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 (16) 견물생심과 ‘간음한 여인’

조송원 기자 승인 2021.11.27 19:30 | 최종 수정 2021.11.30 08:45 의견 0

‘승용차로 갈까, 자전거로 갈까?’ 이것이 문제로다. 며칠을 오전 서너 시간 친구 감 농장에서 대봉 감을 땄다. 점심을 같이하고 난 후 나는 귀가한다. 친구는 감을 선별, 상자에 고이 담아 택배 보낼 준비를 한다. 아침에 친구는 나를 태우러 오고, 일이 끝난 후 데려다준다. 오늘은 친구가 연일 계속되는 노동에 피곤하기도 하고, 택배 물량도 많아 그냥 내가 친구 승용차를 몰고 집으로 왔다.

개 먹이가 거의 다 떨어졌다. 이삼일 땟거리밖에 남지 않았다. 15kg짜리 개 사료를 사려면 1km 남짓의 면소재지 농협에 가야 한다. 여느 때는 노끈으로 멜빵을 만들어 어깨에 걸어 짊어지고 자전거를 타고 사왔다. 어깨가 아프기도 하고 좀은 힘들기도 하고, 꼴도 사납다. 마침 승용차가 있다. 승용차로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게 옳은 일인가? 꼭 도둑질은 아니라하더라도, 이게 바로 ‘견물생심見物生心’이 아닐는지.

『설원說苑』 <잡언편雜言篇>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가 외출을 하려는데, 우산이 없었다. 그러자 제자가 말했다. “자하子夏가 우산을 갖고 있으니, 그것을 이용하시지요.” 이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자하는 사람됨이, 재물에는 아주 약하다. 내가 듣기로는, 사람과 사귈 때에는 상대의 장점은 늘 추겨주고, 그 단점은 고쳐주도록 해야, 그 사귐이 능히 오래간다고 하였다.”

공자는 자하의 우산을 빌리지 않았고, 나는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친구는 결코 ‘재물에 약한’ 사람이 아니다. 친구는 새 차를 예약했다. 곧 신차가 출고하면, 이 승용차는 나에게 아무 대가없이 넘긴다고 했다. 다만, 그는 대단히 절제된 삶을 살며, 경제적인 일에 절도 있는 방식으로 대한다. 결코 허튼 일은 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그의 차를 운행 중 신호위반이나 과속 딱지를 맞았다면, 그는 내게 과태료 고지서를 보여주지 않고, 자신이 납부해 버릴 것이다. 그렇지만 친구는 ‘신뢰의 허망함’에 쓴맛을 다시지 않을까?

바실리 폴레노프,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
바실리 폴레노프,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의 명쾌한 해법을 같이 읽어보자.(요한복음 8장3절~8장11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했다. “선생이여, 이 여인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인을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고 손가락으로 땅에 쓰고 있으시니, 그들은 묻기를 계속했다.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 땅에 (뭔가를)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서 있는 여인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시어, 여인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인이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은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定罪한 자가 없느냐?” 여인이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개 사료 포대를 짊어지고,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는다. 노끈이 어깨에 파고든다. 좀은 아프다. 그러나 맞바람이 시원스레 느껴진다. 아직 시력이 괜찮다. 맨눈으로 글을 읽는다. 이 좋은 눈으로 세상이란 책을 읽기에만 오로지한 게 아닐까? ‘내 안의 간사함’을 애써 외면하면서 말이다. 이제 ‘내 마음이란 책’을 일부러라도 읽어야겠다.

<작가 / 선임기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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