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 (26) 말을 하려다 말을 잊다

조송원 기자 승인 2022.01.20 10:18 | 최종 수정 2022.01.23 10:27 의견 0

깜돌이와 흰돌이, 그리고 내가 시골 모옥에서 동서(同棲)한다. 온통 까만 강아지와 온통 하얀 강아지가 우연한 인연으로 내게 왔다. 나는 그들에게 밥을 주고, 그들은 내게 웃음을 준다.

뉴기니 원시민(Dani)의 언어에는 색을 지칭하는 단어가 ‘밝다’(mola)와 ‘어둡다’(mili)의 둘밖에 없다. 그러나 색을 알아맞히는 실험에서 색의 변별력은 영어 화자와 별반 다르지 않음이 밝혀졌다. 곧, 색채어가 둘밖에 (그것도 명암만 구별하는) 없는 Dani어 화자나 색채어가 풍부한 영어 화자나 성적이 비슷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도 ‘푸르고’, 풀도 ‘푸르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blue(靑)와 green(綠)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무지개색은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 색이라들 한다. 그러나 컴퓨터 프리즘으로 분광해보니 7색이 아니라 207색까지 구분이 되어졌다. 정확하게 207색에 이름을 붙인다면? 이름 안 붙임만 못하다.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는 7색으로 구분해도 무방하다. 언어는 ‘기억의 한계’와 생활의 편의와의 적절한 조화의 결과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언어 자체가 진실일 수 없듯, 진실은 ‘보이는 것’ 너머에 존재한다.

돈이 있으면 개도 멍첨지가 되고, 곳간에서 인심이 나며, 돈이 있으면 금수강산이요 없으면 적막강산이다. 유교의 선비정신을 기린 탓에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지만, 속담으로 봐 우리 민족은 본디 참 자본주의(돈제일주의)적이다. 현대 주류 경제학을 이미 조선시대에 체현하고 있지 않은가.

주류 경제학에서는, 개인은 전력을 다해 자기이익을 좇는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이타적 행위도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때문에 수행된다고 가정한다. 타인에 대한 동정심으로 돕는 행위도, 그 행위로 인해 이타적 행위자가 스스로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대의에 대한 헌신, 사심 없는 올바른 목적 추구 등에는 어떤 가치도 두지 않는다. 주류 경제학의 논리에 따르면, ‘진정한 사랑’(Platonic Love)은 아주 ‘비경제적’ 행위가 된다.

우리의 자본주의적인 에토스(Ethos. 관습)는 ‘중산층의 기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한국 중산층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부채 없이 30평 이상의 아파트를 소유할 것
2. 월 급여가 500만 원 이상일 것
3. 2,000cc급 이상의 중형차를 소유할 것
4. 통장 예금 잔고가 1억 원 이상일 것
5. 1년 1회 이상의 해외여행을 다닐 것

아파트의 바다
아파트의 바다. 금정산 케이블카에서 본 부산 동래구 연제구와 멀리 수영구와 해운대구. [사진=조송현]

오직 ‘돈 냄새’만 난다. 정신도 의미도 없다. 개인뿐이다. 사회가 설 자리는 없다. 다른 나라도 그럴까? 자본주의를 태동시켰으며, 개인주의가 만연하다고 우리가 지탄하고 있는 서구 각국은 어떠할까?

<프랑스>
1. 외국어를 하나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함
2.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어야 함
3.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어야 함
4. 남들과 다른 맛을 내는 요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함
5. 사회적 공분에 의연히 참여할 것
6.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것

<영국>
1. 페어플레이를 할 것
2.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3.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4. 불의, 불평, 불법에 의연하게 대처할 것
5.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미국>
1. 자신의 주장에 떳떳할 것
2. 사회적인 약자를 도와야 함
3. 부정과 불법에 저항할 것
4.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있을 것

‘전력을 다해 자기 이익을 좇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이익’은 돈벌이지만, 이보다 더 나은 가치는 없는 것일까? 삶에는 목적이나 의미가 없단 말인가? 파스칼의 기독교 변증법이 참고가 되지 않을까?

“신을 믿는다. 설령 신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신이 존재한다면 영원한 행복을 얻을 것이다. 반면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러면 신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신이 존재한다면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해우소(解憂所, 뒷간)에 간다. 깜돌이와 흰돌이는 내가 방문을 열고 나올 때부터 짖고 야단이다. ‘근심’을 해결하고 곧장 곳간으로 가서 사료를 한 바가지 퍼 나온다. 깜돌이는 덩치가 크니 좀 많이, 흰돌이에게는 조금 적게 나눠준다. 꼬리를 치며 게걸스럽게 먹는 품새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

다음은 온돌방에 군불을 지필 차례다. 추운 날엔 뭐니뭐니해도 따뜻한 게 보배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에 몸도 따스하게 녹는다. 종일 기거할 방도 데워지겠지, 마음까지 훈훈해진다. 아, 뭔가? 따습게 스며드는 행복감, 아마 도연명도 이 느낌이었으리라.

이런 가운데 참뜻이 있어(此間有眞意 차간유진의)
말을 하려다 어느덧 말을 잊었네(欲辯已忘言 욕변이망언)

*중산층의 조건에 대한 자료는 ‘치킨요정의 경제공부방’에서 따왔음을 밝힙니다.

<작가/선임기자, ouasaint@injurytime.kr>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