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 (45) 브루노, 탁오, 그리고 윤휴

조송원 기자 승인 2022.06.21 21:17 | 최종 수정 2022.06.26 19:23 의견 0

#1. 어떤 사람이 깜깜한 밤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반대쪽에서 소경이 등불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의아해서 물었다. “당신은 소경인데 등불이 필요하오?” 소경이 대답했다. “내가 이 등불을 들고 걸어가면, 눈 뜬 사람들이 내가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까요.” -마빈 토케어/탈무드-

#2. 혁명적인 변화를 일컬어 흔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한다. 이 말은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인식론적 혁명을 이룩한 철학자 에마뉴엘 칸트가 처음 언급했다. 칸트가 인식의 중심을 인식의 대상에서 인식의 주체, 즉 인간으로 전환한 것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1473~1543)가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로부터 이어진 지구 중심의 천문학에서 태양 중심의 천문학으로 혁명을 이룬 것처럼 칸트도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어진 대상 중심의 인식론에서 인식의 주체(인간) 중심으로 인식론의 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칸트 이후 이 용어는 사고방식이나 견해가 종래와는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되었다. 이처럼 코페르니쿠스는 인류의 우주관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그가 한 일은 잘 알려졌듯이 태양 중심의 우주체계(지동설)을 수립한 것이다. -조송현/우주관 오디세이-

위대한 업적과 세속적 행복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인류 고유 속성인 ‘끼리끼리 문화’에 구멍을 내는 게 선각자의 일이다. 그는 보통 그 시대의 ‘왕따’이다. 더러는 목숨도 내놓아야 하는 불행한 왕따이다. 그러나 몇 세대의 세월이 지나면 그 왕따의 업적이나 사고思考가 보통사람들의 끼리끼리 문화의 가치관이 된다. 그러나 선각자는 불행한 최후를 맞아, 사리지고 없다. 보통사람들이 훗날 그의 공을 기린들 무슨 소용이랴. 마는 인류의 인지 혁명 나무는 이 같은 희생을 거름으로 하여 끊임없이 자라왔다.

인류의 세계관에 혁명적인 전환을 가져온 첫 번째 사건이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지동설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우주체계는 그가 사망 직전(1543년)에 제자 게오르그 레티쿠스에 의해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발간되었다. 이 책은 당시 천문학자와 종교가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후 갈릴레이(1564~1642)와 뉴턴(1643~1727) 등의 연구에 의해 완전히 실증되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자신의 새로운 우주체계에 대한 구상을 왜 사망 직전에 펴내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선입견으로 지구중심의 천동설 입장에 선 중세 교회의 박해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증거는 없다고 한다(조송현/앞의 책).

그러나 필자는 코페르니쿠스가 왕성한 활동기에 자신의 우주관을 세상에 피력했다면, 주류·지배담론과 어긋나는 지동설을 널리 알렸다면, 어떤 형태로든 핍박을 받았을 것으로 추론한다. ‘끼리끼리 문화/믿음’에 반하는 자유로운 사상가를 제거하는 데 있어, 지구의 이쪽과 저쪽이 어떻게 이다지도 꼭 같은지, 그 역사의 실례를 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조르다노 브루노(1548~1600), 중국의 이지(탁오. 1527~1602), 조선의 윤휴(1617~1680).

브루노는 로마 거리에서 수레에 실려 구경거리로 끌려 다녔다. 얼마 후 예수회 사제들은 캄포 데 피오리 광장에서 그를 발가벗긴 뒤 불태워 죽였다. 브루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가 종교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은 꼭 이 때문만은 아니다. 죄목은 신성모독(성모 마리아 처녀성 부인), 교리에 대한 이단적 해석(삼위일체 부인), 그의 철학과 우주론에 대한 이론(태양 중심 지동설) 등이다.

A BRUNO
Il Secolo Da Lui Divinato Qui
Dove il Rogo Arse
(브루노에게,
그대가 불에 태워짐으로써 그 시대가 성스러워졌노라.)

이탈리아 '캄포 데 피리오'(꽃의 정원) 광장에 세워져 있는 '자유로운 사고의 순교자' 브루노 동상 [출처: 위키피디아]

이탁오는 『분서焚書』와 『장서藏書』를 남겼다. 분서란 ‘읽고 불태워 버리라’는 뜻이며, 장서란 ‘숨어서 읽고 감추어라’는 뜻이다. 당대 주류 사상을 비판한 내용이니 신변의 위협을 막으라는 저자의 배려가 담긴 책이름이다. 하나의 예만 들자. 공자는 “여자와 민중은 교화하기 어렵다고들 한다. 가까이하면 불손하고, 멀리하면 원망한다.”(논어/양화)고 여자의 식견을 무시했다. 탁오는 “여자와 남자는 단지 생물학적 형태의 차이이지, 식견에는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실제로 여성 제자를 양성하고 그들과 함께 공부했다. 그러나 유학자의 탄핵 상소로 체포·투옥되어 감옥에서 자진했다.

송시열이 윤휴를 찾아가 물었다. “아직도 주자의 해석이 그르다고 생각하는가?” 윤휴가 대답했다. “공은 어째서 주자만이 공자의 뜻을 알고 나는 모른다고 하는가?” 윤휴는 주자의 학설을 그대로 추종하는 데서 벗어나 경서의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 주자의 주해는 물론 다른 유교 경전에 대해서도 재해석을 했다. 반면, 송시열은 주자에 목숨을 걸었다. “주자의 서술에서 1점 1획을 더하고 빼는 것도 할 수 없는 일이다.”고 주희를 절대화했다.

숙종은 유배지로 가고 있는 윤휴를 잡아와 사약을 내렸다. 역모 사건에는 연루시키지 않았지만, 죄목에 “경전을 배척해 장구를 바꿨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는 윤휴가 『중용』의 장구를 풀이하면서 주자의 풀이를 반대하는 주장을 편 것을 말한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송시열이 있었다. 그는 윤휴를 이단이며 소인이라고 배척했다. 비록 윤휴는 당쟁의 희생자이지만, 한국 역사상 최초로 ‘사문난적’이라는 혐의로 죽음을 당한 사례에 해당한다. 조선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주자학 이론에서 벗어나 다른 견해를 가지면 이단으로 몰려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척박한 사상적 풍토로 바뀌었다.

브루노에게는 처형당한 지 379년 만인 1979년에 “사형 선고는 부당”이라는 재심 판결이 내려졌다. 2000년에는 브루노 처형 400주년을 맞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폭력적인 사형 선고와 집행에 대하여 사과했다.

공자의 남녀차별과 이탁오의 남녀평등, 누가 옳은가? 인공지능이 선도할 내일 세대는 ‘송시열적’ 사고와 ‘윤휴적 사고’, 어느 쪽이어야 할까?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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