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죽었다” -니체-
“니체 너 죽었다” -신-
“니네 둘 다 죽었다” -청소아줌마-
-독일에서 한때 유행했던 농담-
“저 책 좀 빌려주시면 안 돼요?” 요즘 세태에서 보기 드물게 후배가 서가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광역시의 중등교사다. 집안 제사 때나 방학과 명절에 맥주 몇 병 사들고 꼭 찾아준다. 부부교사라서 살만해서인지는 몰라도, 아파트 값 등락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문학으로 세상을 읽고 싶어 하는 쪽이다.
“‘차라투스트라’(Zarathustra)는 독일어이고, 영어로는 ‘조로아스터’(Zoroaster)인 줄 혹 알아? 고대 페르시아의 예언자, 그 조로아스터 말이다. 예수보다 약 1천 년 전의 사람.”
“그래요? 니체 하면 ‘신은 죽었다’와 ‘권력에의 의지’ 아닙니까? 니체 사상의 진수眞髓가 『차라투스트라···』에 있다는 말을 귀동냥한 적이 있어서······.”
나도 니체의 사상을 잘 모른다. 『차라투스트라···』는 어렵다. 기독교 문화와 신약성서에 기댄 은유와 패러디가 많다. 한국인으로서는 낯설 수밖에 없다. 니체를 이해하려면, 우선 쇼펜하우어의 ‘생에의 의지’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19세기 후반의 시대적 배경에도 밝아야 한다. 그리고 서양사상의 흐름, 특히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한 비판적 이해도 필요하다. 곧, 선행학습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2차방정식도 모르면서 어찌 3차방정식을 풀 수가 있겠는가!
다만, 어줍게나마 나름의 ‘니체 해석’은 갖고 있다. 큰 맥락에서 ‘신은 죽었다’와 ‘권력에의 의지’는 같은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니체는 신의 존재 여부나 살아 있든 죽었든, 별 관심이 없었다. ‘신이 죽었다’는 그리스도교적 절대가치를 부정한, 은유적 표현일 뿐이다. 전통적인 윤리나 도덕 등 낡은 가치관과 함께 어떤 절대가치는 인간성을 억압하고 자유를 구속한다. ‘The will to power’는 ‘힘에의 의지’라 번역함이 더 니체의 본뜻에 가깝다. ‘권력’이라 하면 정치권력이 연상돼 부정적인 뜻이 되기 때문이다.
니체는 힘을 존중했다. 타인을 지배하는 힘이 아니다. 자아를 끊임없이 향상시키는 힘을 말한다. ‘노예도덕’에서 벗어나려는 ‘힘에의 의지’를 발휘하라. 그리하여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참나’(ideal-self)를 실현하라. 이 참나를 초인超人이라 생각한다. 이 초인은 초능력자인 슈퍼맨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인간을 뛰어넘은 인간’ 곧 overman을 뜻한다. 이 참나는 어떤 역경에 처하더라도 자기 운명을 사랑할 수 있다. 곧 운명애, 아모르 파티(Amor Fati)이다.
“혹 책에 대해 ‘삼치三癡’란 들어봤어?”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 란 말을 들어봤지만······.”
“책 빌려달라는 바보, 빌려달란다고 빌려주는 바보, 빌린 책 돌려주는 바보.”
농담 속에는 번뜩이는 비수를 품고 있다. 책은 1회용 자판기 커피 잔이 아니다. 서가에 꽂혀 있을 정도이면 두고두고 참고하겠다는 뜻이다. 빌려 달라함은 소장자에 대한 실례이다. 나아가 더 심각한 문제는 지식이나 정보에 대한 ‘공짜의식’이다. 유용한 지식이나 정보라면 그 생산자에게 최소한의 비용은 지불해야 하지 않을까?
니체도 『차라투스트라···』를 자비로 출판했다. 그가 빈한했다면,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머릿속에만 머물다 니체의 무덤 속에 묻혔을 것이다. 돈으로 환산 불가한 고귀한 지식들이 공짜의식 때문에, 특출하나 무명이고 가난했던 사람의 무덤 속으로 얼마나 사라졌겠는가.
한국의 언론 신뢰도는 매우 낮다. ‘기레기’라고 싸잡아 기자들을 욕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물론 수구언론의 탓이 크다. 기득권 수호를 위해 정보를 왜곡하고, 뉴스를 선택적으로 보도한다. 그러나 이유가 이게 전부일까?
지식과 정보를 생산하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든다. <뉴욕타임스>나 <아사히신문>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읽을 만하다고 생각해 클릭하면 대부분이 유료 서비스다. 과문 탓인지는 몰라도 한국 신문 인터넷판에서 유료인 기사를 본 적이 없다. 사실 정당한 비용 지불 없이, 제대로 된 지식이나 정보 혹은 뉴스 취득을 바란다는 게 이치에 안 맞다. 공짜의식을 버리지 않는 한, 수구언론의 사주와 광고주의 입맛에 맞는 정보나 뉴스만이 판을 칠 것이다. 감히 말해, 언론을 탓하고 기레기라고 기자를 욕하는 것은 제 얼굴에 침 뱉는 꼴이다.
후배는 생각이 짧았다며 겸연쩍어했다. 사실 내 책은 ‘짜라투스트라’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듯, ‘1987년 판’이다. 당시의 우리 번역 수준이라 내용도 부실하다. 우선순위에는 밀려있지만, 최신판을 새로 구입해 시간 만들어 찬찬히 정독하고 싶다. 하여 후배에게 최신판을 사서 읽고, 정 곱씹어 읽을 요량이면 영문판과 대조하며 읽어보길 권했다. 그리고 욕심을 냈다. 혹 다음에 찾아올 때, 맥주 대신 영문판 『차라투스트라···』 가져올 수 없겠냐고.
그러마,고 후배가 말했지만, 기대는 안 한다. 괜히 ‘모난 돌’인 내가 후배의 심사를 어지럽히지 않았는지, 마음이 쓰일 뿐이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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