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신부가 시부모에게 처음 인사하는 자리에 육친六親이 모두 모여 있었다. 짙은 화장에 성장盛裝을 하고 있는 신부의 아름다운 모습에 구경 온 사람들이 모두 혀를 차며 경탄해 마지않았다. 바야흐로 신부가 시부모 앞에 나아가 술잔을 올리려 할 때, 별안간 방귀를 뀌니 친족들이 모두 웃음을 참으며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유모가 사태를 감당하고자 하여 얼굴을 붉히며 급히 일어나 사과했다. “소인이 연로한지라 꽁무니가 물러 그만 실례하고 말았사오니, 황공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시부모가 기특하게 여기고 유모에게 포목 한 필 반을 상으로 주니, 신부가 그것을 빼앗아 가며 말했다.
“내가 뀐 방귀인데 상을 왜 유모가 받누?”
-『명엽지해』,「방비쟁상放屁爭賞」(류정월/오래된 웃음의 숲을 거닐다,에서 재인용)-
인간은 세계관을 통해서 자연을 이해하고 사회현상을 설명하고 세계와 인간을 평가한다. 목적론과 기계론으로 대별할 수 있다. 목적론은 아리스토델레스(BC 384~322)의 주장으로, 세계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은 일정한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존재하거나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기계론은 모든 자연현상을 인과관계와 역학 법칙으로 설명하려는 세계관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16~17세기 근대과학이 등장하면서 관심이 기계론적 설명에 집중되었고, 뉴튼, 베이컨, 데카르트에 의해 확립되었다.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者’, 곧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조물주(창조자)나 신을 상정하지 않는 한, 목적론적 세계관은 자연과 인간을 해석하는 데 별무소용이다. 하여 근대과학이 발전하자 용도폐기되었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목적론적 세계관이 BC 4세기경부터 AD 16세기경까지 약 2000년 동안 서양인의 세계관을 지배했다.
조선에서 사상의 시장은 성리학이 독점했다. 유교경전에 대해 주자朱子(주희朱熹. 1130~1200)의 해석과 다른 창의적인 발상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하여 처벌했다. 거의 같은 시기 서양에서는 2000년 고래古來의 세계관을 버리고, 더 설명력이 높은 세계관을 만들어내어 지적 성장에 박차를 가했다. 거꾸로 조선에서는 2000년 전의 공자(BC 551~479)의 세계관을 공고히 하는 데에 더욱 열을 올렸다. 그 결과로 서양의 근대과학을 수용한 일본에 병탄 당한 것이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는 필자보다 2342년 전에 태어났다. 그 세월만큼 시대상황도 다르고, 세계관도 판이하다. ‘인류의 스승’이란 경칭에 걸맞은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복론’을 설파했다. 필자는 행복론은 펼칠 만한 학문적 능력이 없다. 심지어 이 책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가도 의문이다. 그래서 그의 행복론의 핵심을 요약해낼 재간도 없다. 물론 필자가 생각을 정리하려는 것은 ‘행복론’이 아니다. 조금만 관심하면 발견하여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일상에 널려있는 행복 파편들의 주워 담기이다.
어떻든 ‘행복’에 대해 숟가락을 하나 얻으려면, 행복론에 대한 고전인 『니코마크스 윤리학』에 대한 언급은 빠뜨릴 수 없다는 부채의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몇 날을 고민했지만 이 책의 핵심을 요약한다는 것은, 필자의 능력을 넘는 과업일 뿐 아니라, 내용의 본질상으로도 불가능함을 절감했다. 하여 원전의 핵심 구절을 필자 임의로 재구성해 제시하는 것으로 가름한다. 저본은 이창우, 김재홍, 강상진이 옮긴 2006년 판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시중에 나온 번역본 중 가장 최신판으로 알고 있다.
여담으로 ‘니코마코스’는 무슨 뜻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 이름이 니코마코스다. 그런데 아들의 이름도 니코마코스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내인 피티아스가 죽은 후, 그의 여생을 보살펴 준 헤르필리스라는 여종이 낳은 아들이 바로 니코마코스다. 당시에는 헌정 받을 사람의 이름을 책명에 넣었다. 따라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들 니코마코스에게 주는 윤리학’이라고 하겠다.
“모든 기예技藝와 탐구, 또 마찬가지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좋음을 모든 것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옳게 규정해 왔다. 좋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것들이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목적이다.
만약 ‘행위될 수 있는 것들’의 목적이 있어서, 우리가 이것은 그 자체 때문에 바라고, 다른 것들은 이것 때문에 바라는 것이라면, 또 우리가 모든 것을 다른 것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것이 좋음이며 최상의 좋음(최고선)일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우리는 행복을 언제나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하지,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행복이 바로 그렇게 자족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행복은 완전하고 자족적인 어떤 것으로서 행위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의 목적이다. 행복이 곧 최고로 좋은 것(최고선)이다.
행복이란 인간의 기능을 잘 발휘하는 것이다. 피리 연주자와 조각가 그리고 모든 기술자에 대해서 또 일반적으로 어떤 기능과 해야 할 행위가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그것의 좋음과 ‘잘함’은 그 기능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처럼 인간의 경우에도 인간의 기능이 있는 한, 좋음과 ‘잘함’은 인간의 기능 안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곧 이성(logos)의 기능을 잘 발휘하는 실천적 삶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행복은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
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부정한다. 그 세계관에 따른 행복론에도 별 지적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의 행복론의 좌표가 인간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뜻을 같이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적 행복의 한계인 운명의 의미를 정확히 통찰했다. 그러나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인간적인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훌륭한 사람은 아무리 엄청난 불행이 와도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지극히 복될 수는 없겠지만, 결코 비참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만 했다. 곧, 운명의 극복을 위해 ‘신의 은총’을 구하는 기도 따위는 하지 않았다. 니체의 운명애와 같은 행복관이다. 신의 은총으로 지복至福을 얻고자 함은 중세 신학의 몫이었다.
‘행복 줍기’는 인간적 행복의 최대 적인 운명, 혹은 불행한 현실에서 출발한다. 누구의 잘잘못이건 간에 ‘지금, 여기’에 처한 현실이 운명이다. 이 운명에 만족한다면, 행복론이나 행복 줍기 따위에 관심할 이유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주위에 널린 행복의 파편들을 주워 담는 생활이면 조금은 더 살만한 삶이 되지 않을까?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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