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정의’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에 풍미한 적이 있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그 기폭제였다고 생각한다. 당시 사회에 만연한 ‘부정의’가 고성능 화약덩어리였고, 그 도화선에 불을 댕긴 게 아마 샌델의 이 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서가에서 이 책을 빼서 보니 ‘1판 1쇄 인쇄’가 2010.5.17.이고, 40일 만인 6.27.에 9쇄를 찍었다. 정말 ‘날개 돋친 듯이’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이다. 지금도 저명한 법학자나 철학자가 ‘법치란 무엇인가’ 혹은 ‘공정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낸다면, 아마 십중팔구 밀리언셀러가 되지 않을까?
“당신은 전차 기관사이고, 시속 100km로 질주한다고 가정해보자. 저 앞에 인부 다섯 명이 작업 도구를 들고 철로에 서 있다. 전차를 멈추려 했지만 불가능하다.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이 속도로 들이받으면 인부들이 모두 죽고 만다는 사실을 알기에 절박한 심정이 된다. 이때 오른쪽에 있는 비상 철로가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도 인부가 있지만, 한 명이다. 전차를 비상 철로로 돌리면 인부 한 사람이 죽는 대신 다섯 사람이 살 수 있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정말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샌델은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또 다른 예화로 도덕적 추론을 이어가며 독자들을 차라리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 샌델은 이 책에서 인류역사상 도덕철학이나 정의 분야에서 탁월했던 고수들을 시대를 막론하고 불러낸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벤담, 밀, 롤즈······. 정의가 무엇인지, 간절한 지적 호기심으로 이 책을 펼쳤더라도 머릿속이 더 복잡해진 상태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혼돈(chaos)은 창조의 모태이다. 추상적이고 태생적으로 복잡하고 맥락의존적인 정의를, ‘이것이다’고 가리켜주는 손가락은 없다. 하여 정의에 대한 모든 논의는, 정의를 사색케 하는 고난도 지적 유희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유희를 즐기다보면, 언젠가 복잡한 머릿속이 환하게 맑아지는 ‘법열’을 맛보게 되지 않을까?
마이클 샌델의 ‘기관차 문제’는 지적 유희물인데 반해, 유발 하라리의 자율주행차량은 현실적인 문제다.
“두 꼬마가 공을 쫓아서 자율주행 차량 앞으로 뛰어드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차량을 운전 중인 알고리즘은 번개처럼 빠른 계산으로 두 꼬마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반대 차선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럴 경우 마주 오는 트럭과 충돌하는 위험을 불사해야 하는데, 그때 차량 주인-뒷좌석에서 단잠에 빠져 있다-이 사망할 확률은 70퍼센트라고 계산한다. 이럴 때 알고리즘은 어떻게 해야 할까?”
유발 하라리가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던진 질문이다. 유발 하라리의 논의를 좀 더 따라가 보자. 물론 간간이 필자의 주관적 해석이 개입해, 하라리 의견의 원본은 아니다.
사회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고약한 실험 중의 하나는 1970년 12월에 프린스턴 신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행한 것이었다. 장로교 목사가 되기 위한 수련을 받고 있던 신학생들에게 각각 멀리 떨어진 강의실에 급히 가서, 선한 사마리아인 우화에 관한 설교를 하도록 시켰다.
이 우화에 따르면, 한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여행하는 중에 강도를 만나 죽도록 얻어맞고 길가에 내버려졌다. 한참 후에 제사장과 레위 사람(유대 신전에서 제사장을 보좌한 사람)이 그 옆을 지나갔지만 둘 다 이 유대인을 외면했다. 반면 평소 유대인들이 아주 멸시했던 분파分派 사람인 사마리아인은 피해자를 보고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봐주어 그의 목숨을 구했다. 이 우화의 교훈은, 사람의 가치는 종교의 소속 여부가 아니라, 실제 행실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열성적인 젊은 신학생들은 저마다 서둘러 강의실로 향했다. 가면서 어떻게 하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교훈을 잘 설명할지를 생각했다. 실험자들은 신학생들이 가는 길목에 병들어 신음소리를 내는 남루한 차람의 남자를 배치했다. 신학생들은 하나같이 그 남자를 지나쳤다. 대부분은 돕기는커녕 가던 길을 멈추고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강의실에 서둘러 가야 한다는 감정적 압박 때문에 곤경에 처한 이방인을 도와야 한다는 도덕적 책무를 저버린 것이다.
이처럼 수천 년간 지속되어온 정의나 도덕적 의무 등에 관한 철학적 논쟁은 인간의 실제 행동에 미친 영향은 민망할 정도로 미미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위기의 순간에 처하면, 철학적 견해나 교훈은 다 잊고 대신 자신의 감정과 직감을 따르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컴퓨터 알고리즘은 감정이나 직감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위기의 순간에도 윤리적 지침을 인간보다 더 잘 따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율주행 차량을 프로그래밍 할 때, 곤경에 처한 낮선 사람을 발견하면 멈춰서 돕도록 입력해 두면,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그렇게 실행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자율주행 차량이 길 위의 두 아이를 구하기 위해 반대 차선으로 방향을 틀도록 프로그래밍 돼 있다면, 말 그대로 당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그렇게 실행에 옮길 것이다.
이 말은 현대자동차나 테슬라가 자율주행 차량을 설계할 때 도덕철학의 이론적인 문제를 현실적인 공학의 문제로 바꿔놓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자율주행 차량을 생산하는 회사의 도덕철학은 뭘까? 도덕철학이라는 고상한(?) 이름에 민망하지만, 단연 ‘수익’이다. 그 수익은 고객의 욕망에 부응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 그럼 고객은 어떤 알고리즘을 장착한 자율주행 자동차를 선호할까? 자율주행 차량을 출시하려는 회사는 설계 단계에서 두 가지 모델을 상정할 것이다.
바로 박애주의자 차량과 에고이스트 차량이다. 박애주의자 차량은 긴급한 상황에서 더 큰 선善을 위해 주인을 희생시킨다. 반면, 에고이스트 차량은 두 아이의 사망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주인만을 구한다. 고객은 두 가지 모델 중에서 자신의 철학적 견해에 맞는 차량을 구입할 것이다. 그렇다면 고객은 어떤 선택을 할까?
2015년에 실시된 선구적인 설문조사에서, 자율주행 차량이 여러 명의 보행자를 치려고 하는 가상의 시나리오가 제시된 적이 있었다. 응답자의 대부분은 그런 경우 주인이 숨지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행자를 구해야 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실제로 더 큰 선을 위해 주인을 희생시키도록 프로그래밍 된 차량을 구입할 것이냐는 질문에는 대부분이 아니라고 답했다. 자신이 사용할 차량으로는 에고이스트 차량을 택하겠다는 뜻이다.
현실적인 상상을 해보자. 당신이 새 차를 샀다. 이 차에는 박애주의자 모델과 에고이스트 모델이 함께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그 중 하나를 운행하기 전 설정 메뉴에서 선택하면 된다. 일단 한 번 선택하게 되면 되돌릴 수는 없다. 메뉴 선택에서 당신의 남편, 혹은 아내와 순순히 합의에 이를까? 합의에 이르지 못할 때의 언쟁,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따라서 필자의 추론으로는, 곧 결혼정보회사의 체크리스트에서 1순위는 이 설정 메뉴가 될 것이다. 아마 늦어도 30년 내에 현실이 될 것이다.
정의가 갈급한 사회에서 박근혜 씨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그리고는 탄핵했다. 법치와 공정을 부르짖는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하지만 그의 지지율은 20% 초반이다. 실질적으로는 이미 10%대로 하락했는지도 모른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
단기적으로 보면 언론의 탓이 크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인저리타임> 2022년 8월 8일자, ‘조송현/유권자의 현명한 선택이 필요하다고?’를 참조하기 바란다.) 장기적으로는 수천 년 지속돼온 인류의 주류 철학의 세뇌, 혹은 학습 탓이다.
인간은 교육에 의해 인격이 성숙해 간다. 교육은 좁은 의미의 공교육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화 과정도 교육의 큰 부분이다. 사회의 에토스(도덕적 관습이니 기풍)에 자연스럽게 물드는 것도 큰 교육이다. 이 에토스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게 주류 철학이다. 서양의 플라톤 철학과 동양의 유학이 바로 그것이다.
귀족주의 혹은 엘리트주의자인 플라톤(기원전 4세기 경) 이전 히포다모스(기원전 5세 기 경)와 팔레아스(기원전 4세기 경)란 민주적 사상가가 있었다. 귀족적 봉건주의자인 공자(기원전 5세기 경)와는 달리, 노자(5세기 경)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설파했고, 묵자(기원전 4세기 경)는 겸애兼愛를 주장하며 민중해방을 부르짖은 혁명적 사상가였다.
플라톤 철학과 공자의 유학은 지배자 담론이고, 노자나 묵자의 사상은 민중의 행복에 관한 담론이다. 사상의 시장은 자유시장이 아니다. 역사가 강자를 대변하듯, 지배자 담론은 비주류 담론을 억압하여 퇴출시키고 종국에는 주류담론으로서 시장을 독점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지배자 담론의 가장 큰 폐해가 ‘내로남불’이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신분제나 노예제가 말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노예가 해방되고 신분제가 철폐된 지 얼마나 되었는가.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여성은 독립적 인격체로 대접 받지 못했다. 여성이 투표권을 가진 지는 100년이 채 안 된다. 그렇다고 지금 이 당장은 여성이나 비주류 출신들의 유리천장이 완전히 사라진 평등한 사회일까?
이 모든 불합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지배자 담론의 무의식적 세뇌의 소산이다. 그런 만큼 2500년 전 민중의 행복에 관한 담론인 노자나 묵자의 사상을 음미해볼 충분한 가치가 있다. 다만, 역사적·사상사적 맥락을 무시하면, 그냥 도덕책 같은 밋밋한 교훈담이 되어 그 진면목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다. 하여 자꾸 ‘천방지축’ 옆길로 새어서, 노자의 불위선(남보다 앞서지 말라)에 직입하지 않고 겉돈다. 그러나 모로 가든 굴러가든 목적지에만 도착하면 되지 않겠는가. 뭐 바쁘다고. 가면서 길섶의 들꽃도 감상하고, 큰 강을 건널 때는 뱃놀이도 즐겨가며, 높은 산도 쉬어가며 허위허위 넘으면서 목적지에 한 발 한 발 다가가련다.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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