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아는 자는 지혜롭고, 자기를 하는 자는 현명하다.
남을 이기는 것은 폭력이요, 자기를 이기는 것은 강포함이다.
자족함을 아는 자는 부유하고, 힘써 행하는 자는 뜻을 이룬다.
자신의 처지를 잃지 않는 것은 영구하고,
죽어도 잊혀지지 않는 자는 장수한 것이다. -노자老子/33장-
둘째 줄의 원문은 ‘勝人者有力 自勝者强’이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남을 이기는 것은 힘이 있는 것이고, 스스로를 이기는 것은 강함이다’ 쯤 되겠다. 시중의 『노자』 번역서들도 이 범위를 넘지 않는다. ‘남을 이기는 이는 힘이 있고, 저 스스로 이기는 이는 강하며’(김경탁), ‘남에게 이기는 자는 힘 있는 자이며, 스스로에 이기는 자는 강한 자이다’(노태준), ‘남을 이김이 힘 있음이라면, 자기를 이김이 강함입니다’(오강남). 도올 김용옥은 자의적으로 가치평가까지 곁들인다. ‘타인을 이기는 자를 힘세다 할지 모르지만, 자기를 이기는 자야말로 강한 것이다’.
이들의 번역에는 은연중에 ‘힘’(力)과 ‘강’(强)은 ‘좋은 것’(善)이고 ‘우월’한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을 삶의 조건으로 하는, 지극히 자본주의적 발상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로 볼 때 우리가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살아온 세월은 그리 길지 않다. 중세 이후로 500년 안팎이다. 그렇지만 『노자』란 텍스트는 2,500년 전의 한자로 씌어졌다.
동양고전을 즐겨 읽었고, 지금도 반복하여 읽고 있다. 15여년 전에 귀향을 했다. 종종 인근의 큰 서점인 <진주문고>에 책 구경을 가곤 했다. 거기서 묵점 기세춘 선생의 저서를 만났다. 동양고전에 대해 새롭게 ‘눈뜸’을 하는 획기적인 순간이었다. 당시, 아니 그 이전 오랫동안 도올 선생의 동양고전 해석이나 그 저서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나 역시 그의 저서 여러 권을 읽었다. 그러나 동양고전에 대한 신선한 현대적 해석에 감탄을 하면서도, 결정적인 구절 여러 곳에서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때에 묵점 선생을 만난 것이다. 왜 ‘획기적인 순간’이라 했는지는, 묵점 선생의 2008년 판 『노자 강의』의 들머리에 실린 ‘재번역운동을 기대하며’의 내용 일부를 소개함으로써 가름한다.
“문제는 패러디나 소설을 경전과 역사인 양 속이는 데 있다. 이는 자신의 창작이라고 하면 팔리지 않으므로 원저자의 권위를 팔아먹으려는 장사꾼의 속임수일 뿐이다. 지금까지 서점에 나와 있는 『노자』 번역서들 거의가 이런 종류의 엉터리 책들이고 그 대표적인 사례가 도올의 번역이다.
나는 지난 2002년 《신동아》 11월호에 도올의 ‘『논어』 강의’에 대한 오류를 지적한 글을 기고한 바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런 응답이 없다. 또한 2005년에는 《우리 길벗》 5월호와 6월호에 도올의 『노자』에 대한 오류를 비판한 글을 발표했으나 역시 아무런 응답이 없다.
솔직한 소견을 말하자면 도올의 『노자』는 하안과 왕필의 죄악을 계승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한술 더 떠서 엉터리 번역과 철부지 같은 엉뚱한 사설을 늘어놓고 있어 한군데도 취할 곳이 없다. 그의 목적은 2천여 년 전의 공자와 노자를 21세기의 자본주의 사상가나 성공한 경영자로 각색하는 데 있는 것 같다. 굳이 그의 공헌이라면 엄중한 역사적·학문적 자료인 『논어』와 『노자』를 비역사적이고 비학문적인 처세훈으로 둔갑시켜 시장의 취향에 영합하여 상품화에 성공한 것을 들 것이다.
급기야 한문학에 전혀 소양이 없는 여류餘流 학자들도 도올은 엉터리라고 들고일어나는 창피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도올은 아무 말이 없다. 그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 같다. 물론 여류 학자들의 번역도 여전히 우리 학자들의 왜곡을 답습하여 본뜻과는 거리가 먼 엉터리지만 그래도 무슨 말인지조차 모를 기존 엉터리 번역서에 비하면 말이나마 통하게 가다듬어졌기에 한결 낫다.”
또 묵점 선생은 고전 번역에 있어서 오역과 왜곡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역이란 낱말의 여러 가지 뜻 중에서 글 취지에 알맞지 않은 것을 골라 번역하거나, 고대 언어를 당시의 뜻이 아니라 현재의 뜻으로 오해한 경우이거나, 문맥을 잘못 짚어 본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착각한 경우를 말한다. 반면 왜곡이란 모어에 없던 다른 뜻을 새로이 첨가함으로써 원저자의 본래 캐릭터를 번역자가 지어낸 모습으로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변조를 말한다. 그러므로 오역은 변명할 수 있지만 왜곡은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며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다시 노자 33장으로 돌아가자. 묵점 선생만이 남을 이기는 것은 ‘폭력’이고, 자기를 이기는 것은 ‘강포함’이라고 부정적으로 해석했다. 의문이 아니 들 수 없다. 이 의문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첫째로는 텍스트에 쓰인 한자를 그 당시의 뜻으로 정확히 해석해야 하고, 둘째로는 이 구절을 노자 사상의 전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단어의 뜻이 달라지는 경우는 많다. 조선 초기의 ‘어엿브다’(어여쁘다)는 ‘딱하다, 불쌍하다’의 뜻이었다. ‘세종어제훈민정음 언해본’에 ‘어린 백성’이나 ‘놈’이 나온다. 여기서는 ‘어리다’는 ‘어리석다’의 뜻이고, 놈은 비칭이 아니라 일반 사람을 뜻했다. 한자도 마찬가지이다. 후한後漢 이전의 ‘寺’는 지금의 ‘절집’을 뜻하는 게 아니라 호텔이나 관청을 의미했다.
경전에 사용된 한자는 그 시대의 뜻으로 해석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묵점 선생은 ‘强=暴也’(강함은 폭력이다)로 주해했다. 힘(力)이 폭력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여 ‘남을 이기는 것은 폭력이요, 자기를 이기는 것은 강포함이다’라고 번역했다. 그러므로 오강남 등은 오역한 것이 되고, 도올은 왜곡한 것이다.
노자 33장의 둘째 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노자 사상의 전체 맥락에서 음미해야 한다.
노자는 공자의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덕四德을 반대하고, 그 대신 삼덕三德을 말한다. 곧, ‘자애慈愛’, ‘검박儉朴’, ‘불위선不爲先’이 그것이다. 특히 ‘불위선’은 ‘천하에 앞서지 않는다’는 뜻으로, 공자의 겸양과는 아주 다른 노자 특유의 사상이다. 왜냐하면 천하의 모든 사람이 남보다 앞서려고 하는데, 이와는 반대로 남보다 앞서지 말라, 혹은 남보다 잘나지 말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 불위선에 노자 사상의 진면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노자 사상의 핵심일 뿐 아니라, 행복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언명임에도 우리가 철저히 간과해 왔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다. 다음 글에서 ‘불위선과 행복’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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