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나라에 어떤 못생긴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비가 밖에 나갔다가 상돌商咄이란 사람을 보고서 돌아와 이웃 사람들에게 “상돌이 내 아들보다 못생겼더군.” 하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의 아들은 지독히 못생겼고, 상돌은 지극히 아름다웠다. 그 아비가 지극히 아름다운 사람을 지독히 못생긴 사람만 못하다고 여긴 것은 자식을 아끼는 마음에 얽매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의 추악함을 알고, 추악함의 아름다움을 알고 난 다음에 능히 아름다움과 추악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장자가 말하기를, “기와 조각을 판돈으로 걸면 노름 기술이 기막히게 훌륭해지고, 장신구를 판돈으로 걸면 떨리게 되며, 황금을 판돈으로 걸면 두려워진다. 노름꾼의 도박 기술이 변한 것이 아닌데도 두려운 바가 있으니, 이는 필시 외부에 얽매이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외부에 얽매이는 바가 있으면, 능숙하게 만지던 주사위 던지기도 안으로부터 서툴러지게 된다.” - 여불위/『여씨춘추』/「팔람八覽」/거우去尤 -
#2. 나스카 지상화.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남쪽으로 400km 떨어진 나스카 일대의 땅에 그려져 있는 거대한 그림들로 거미, 고래, 원숭이, 벌새, 거인 등의 그림이 30개 이상, 소용돌이, 직선, 삼각형과 같은 곡선이나 기하학 무늬들이 104개 이상 그려져 있다. 각각의 그림은 최대 300m의 크기로 매우 거대하기 때문에 오직 하늘에서만 완전한 그림을 볼 수 있다. 기원전 300년경에 그려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크기와 정교함 덕분에 오랫동안 초고대문명설의 근거로 주장되어 왔다. - 나무위키 -
필자는 어쩌다가 나스카의 새 모양 지상화와 그 외 기하학적 표현물을 접하니 절로 경외심이 일었다. 2500년 전의 고대인들이 그린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감동 먹은 ‘가슴’은 불가사의, 외계인, 초능력자, 신神 등의 단어를 불러낸다. 그러나 냉정한 ‘머리’는 단호하다. 분명한 인간의 작품이다. 어떤 초자연적 힘을 개입시킬 이유가 없다. 고대인을 미개인이라고 등치하는 현대인들의 근거 없는 교만이 ‘환상’의 제조자다.
나스카 지상화를 그린 부족의 후예들은 잉카 제국을 이룩했다. 잉카 제국은 1533년 ‘총, 균, 쇠’로 무장한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에 의해 멸망했다. 그러나 잉카 문명이 16세기 스페인 문명에 뒤진다는 증거는 없다. 멸망과 정복은 역사의 우연일 뿐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는 여불위가 편찬한 책이다. 이 책의 편찬 경위와 여불위에 대해 『사기열전』의 「여불위 열전」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여불위(呂不韋 ?~기원전 235년)는 전국시대 한나라의 거상巨商이었다. 그는 조나라에 장사를 하러 갔다가, 조나라에 볼모로 와 있던 진나라 태자의 서자 자초子楚를 만났다. 여불위는 자초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500금을 주어 빈객과 사귀는 비용으로 쓰게 하는 등 투자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자초는 진나라의 왕위에 올라 장양왕이 된다. 장양왕은 여불위를 승상으로 삼고 문신후文信候에 봉하였으며, 하남 낙양의 10만호를 식읍으로 주었다.
장양왕은 즉위한 지 삼 년 만에 죽자, 태자 정이 왕위에 올랐다. 정은 여불위를 존중하여 상국으로 삼고 중부(仲父 둘째아버지)라 불렀다. 진나라 왕(13세)이 어리므로, 태후가 때때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여불위와 사사로이 정을 통하였다.
이 무렵 위나라에는 신릉군, 초나라에는 춘신군, 조나라에는 평원군, 제나라에는 맹상군이 있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선비를 존중하여 빈객 모시는 일을 두고 다투었다. 여불위는 진나라가 강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선비들을 불러 정성껏 대하자 빈객이 3000명에 이르렀다.
이때 제후들의 나라에는 변사辯士가 많았는데, 순경 같은 무리는 글을 지어 천하에 자신의 학설을 퍼뜨렸다. 이에 여불위는 자기 빈객들에게 각각 보고 들은 것을 쓰게 하여 「팔람八覽」, 「육론六論」, 「십이기十二紀」 등 이십여 만 언言으로 모아, 이것이야말로 천지, 만물, 고금의 일을 다 갖추고 있다고 여겨 『여씨춘추』라 불렀다.
그리고 이 책을 함양咸陽의 시장 문 앞에 펼쳐 놓고 거기에 1000금을 걸어, 제후국의 유사儒士나 빈객 중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이에게 그 돈을 주겠다고 했다.
지상화와 기하학적 도형을 그린 나스카 인과 여불위는 50년 정도 차이가 나지만, 동시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나스카 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기록이 없으니 우리로선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도 분명 현대 우리들과 똑같이 그 시대 나름의 ‘행복’이나 ‘삶의 의미’를 추구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땅에다 아무렇게 항칠(환칠, 낙서)을 해댄 게 아니라, 동물을 사실적으로 모사模寫하고, 기하학적 도형을 작성했다. 이건 본능의 발로가 아니라 의도적인 ‘지적 작업’임을 방증한다.
역사가들은 역사적 사실에만 관심할 뿐, 그 주인공들의 행복추구에는 언급하지 않는다. 진화론적으로 볼 때, 인류가 발전시키지 못한 유일한 게 행복이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삶의 우선순위에 둔다. 그러나 유전자는 인간 개체의 행복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환경의 최적자로서 유전자가 길이 보전되도록 개체의 자손이 번성하기만을 도모할 뿐이다.
우리는 정말 유전자의 노예이거나 자동인형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짓거리가 그렇지 않은가! 국가의 경제발전이나 기업의 성장을 위해 우리가 일하는가? 경제대국과 선진국이 되었다. 더 행복한가? 살기가 고달프다는 사람의 비율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매일반이지 않은가. 개개인도 지금보다 어린 시절이 더 행복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행복에 주안점을 둔 연구에서는 현대인이 고대인이나 중세인보다 더 행복하다는 증거는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이 모든 게 ‘행복’이란 가치보다 ‘성장’에 더 관심한 탓이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외적인 ‘성장’이나 ‘발전’에 주력하는 한, 행복은 들어앉을 곳이 없다. 어떤 분야든 최고 스타가, 점심값 싼 데 찾는 당신보다 더 행복할까? 일상생활에서도 타자를 의식해, 진정한 자신이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나 아닌 나’로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 차라리 끔찍하지 않은가!
‘행복에 대한 무지’가 행복의 가장 큰 적이다. 그리고 행복에 대해 앎의 토대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세상에 대한 지식’이다. 나스카 지상화를 볼 때, 어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을까, 고 물어야 한다. 자신이 이해를 못한다고 ‘불가사의’하고, 외계인이나 신을 불러내는 사람은 아마 영원히 행복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이런 사람들은 종종 음모론의 맹신자가 되기도 한다.
여불위는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 너머 지구 반대편에 나스카 문명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다. 모르면 용감해지는 법이다. 『여씨춘추』를 들어 ‘천지, 만물, 고금의 일을 다 갖추고 있다’고 자신만만해 했다. 자기들이 사는 곳이 천하의 중심이라고 자부하는 한족漢族답다. 더구나 부富가 넘치고, 세도가 하늘을 찌르면, 본디 인간은 유치하게 되는 법이다. 그의 운명은 어땠는가?
여불위는 진왕 정이 어렸으므로, 섭정으로서 진나라의 실권을 한 손에 틀어쥐었다. 진왕 어머니 태후와의 불륜은 계속되었다. 진왕은 장성해갔다. 그래도 태후는 늘 불러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려 했다. 여불위는 발각 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음경이 큰 노애嫪毐라는 사람을 몰래 찾아, 태후에게 바쳤다. 그리고 거짓으로 부죄腐罪(남자의 성기를 제거하는 형벌)를 받게 하고는, 환관으로 태후의 시중을 들게 했다.
과연 태후는 노애와 정을 통하면서 여불위는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가 생겼다. 이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태후는 꾀를 냈다. 점을 치게 해 점괘를 거짓으로 꾸몄다. 재앙을 피하려면 궁에서 나와 옹雍 땅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하게 한 것이다. 노애는 언제나 태후를 따라다녔고, 그녀는 후한 상을 내렸으며, 모든 일은 노애가 결정했다. 이로써 노애가 거느린 사람이 수천 명이 되고, 벼슬을 얻기 위해 노애의 사람이 된 자도 1000여명 되었다.
진왕 9년(21세)에 어떤 사람이 이 모든 사실을 고변했다. 진왕은 여불위도 관련이 있음을 알았다. 진왕은 노애와 그의 삼족을 멸하고, 태후가 낳은 두 아들도 죽이고, 태후도 내쫓았다. 상국 여불위도 죽이려 했으나, 선왕을 섬기 공로가 크고, 그의 빈객들과 변사들 중 그를 위하여 변호하는 자가 많아, 차마 법대로 처벌할 수가 없었다.
다음해에 상국 여불위를 관직에서 내쫓았다. 그러나 일 년이 지나도록 제후국의 빈객과 사신들이 잇달아 문신후(여불위)를 방문했다. 진왕은 그가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문신후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대가 진나라에 무슨 공로가 있기에 진나라가 그대를 하남에 봉하고 10만호의 식읍을 내렸소? 그대가 진나라와 무슨 친족관계가 있기에 중부라고 불리오? 그대는 가족과 함께 촉 땅으로 옮겨 살도록 하시오.”
여불위는 스스로 옥죄어 옴을 느끼고, 죽음을 당할까 봐 두려워 독주를 마시고 죽었다. 향년 55세로 추정된다. 이 진왕 정이 17년 뒤인 기원전 221년 재위27년 39세에 중국 대륙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시황이다.
여불위, 그리고 그와 사통한 태후, 그들은 왕위 외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디에 얽매인 것일까?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행복에 관한 한 그들은 하수가 아닐까?
행복은 저 높은 곳에 군림하여, 우리가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실현되어야 할 어떤 과정이다. 우리는 스마트폰 시대에 모두 아주 스마트하다. 그러나 검색하면 행복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될까? 행복은 검색 너머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그러나 행복하려면, 행복의 정체 정도는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
하여 나름 행복에 대한 앎을 시도해 보자. 알아야 모르는 걸 알고, 모르면 모르는 게 없는 법이다. 하지만 사람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게 가장 어렵다. 그렇지만,
“만일 행복이 눈앞에 있다면 그리고 큰 노력 없이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서 등한시되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모든 훌륭한 것은 드문 만큼 어렵기도 하다.” - 스피노자 / 에티카 -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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