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들어 휴대폰의 가장 큰 소용은 ‘알람기능’이다. 대외 관계가 없는 무소속의 단독자로 살기에 출근이나 약속 시각 따위는 상관이 없다. 낮이든 밤이든 피곤하여 눈꺼풀이 무거워지면 자고, 아무 때나 배고프면 거친 음식 가리지 않고 먹는다. 밤새움을 하는 경우가 잦다. 이때 필요한 게 알람기능이다.
한낮 더위와 다투다 보면 쉬 피곤해진다. 초저녁에 자리에 눕는다. 그러면 자정 못 되어 눈이 떠진다. 세수를 하고 책상 앞에 앉는다. 사위는 절간보다 더 적막하고, 선풍기만 돌아갈 뿐, 만물이 정지해 있는 듯하다. 시간 흐름도 멎은 듯하다. 하여 두세 시간이 순간에 훌쩍 지나간다. 의자에서 일어서면 허리가 뻐근하고, 다리도 묵직하다. 움직임 적은 것은 건강의 큰 적이다. 아하, 무릎을 쳤다. 알람 설정. 주기 30분. 한 번은 놓치더라도 알람이 울리면 방 밖으로 나가 스트레칭을 하고, 먼 산을 바라보기를 한다.
젊은 날에 혹은 지난날에 영광이 없었음이 노년에는 축복임을 지긋한(?) 나이에 깨닫는다. 60대가 된 지금 돌아보면, 지난 20대나 30대나 40대나 50대에 딱히 지금보다 더 영광스러운 날들이 없었다. 다만, 젊었을 적에는 ‘가능성’이란 무지개 덕에 아래위나 주위 지인들에게 과분한 기대나 도움을 받은 듯하다. 속칭 ‘잘 나가던 때’가 없었으니, 지금 ‘못 나가도’ 과거를 추억하며 아쉬워할 일이 없다.
스팸 전화 외에는 휴대폰이 울리는 날이 드물다. 전화할 일도 별로 없다. 외로운 건가? 그러나 홀로 있으면 외로움을 모르는데, 어울리면 외로움을 알게 된다. 곧, 홀로 책상 앞에 앉아있을 때는 ‘나를 잊어’(忘我) 의식조차 안 하는데, 어울리면 외롭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곁에 누가 있고 없음이 외로움의 잣대는 아닌 성싶다.
‘과거의 나’의 ‘미래의 나’가 ‘현재의 나’이다. 이 셋은 같은 하나일까, 각기 다른 셋일까? 생물학적으로는 분명 다른 셋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실체’(본원적인 나)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양태’(과거·현재·미래의 나)를 달리했을 뿐인 하나다. 물론 ‘현재의 나’가 과거에 바람직한 미래의 모습으로서 상상한 나는 아니다. ‘현재의 나’처럼 외형이 빈한하고 초라한 미래를 꿈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마는, ‘과거의 나’의 필연이 ‘현재의 나’임을 자각한다. 운명에 떠밀려 어찌저찌하여 지금의 내가 된 게 아니란 말이다. 마음 든든해지는 물질의 두둑함, 선망의 뭇 눈길을 받으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직위, 그 누가 바라지 않겠으며 추구하지 않겠는가. 나 역시 그럴 염도 냈고, 추구도 했다. 그러나 실패나 좌절이라기보다는 전력투구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랬더라도 성취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다만 지난날을 반추해 보면, 마음 저 깊은 곳에 현실적 성공에 대한 욕구와는 결을 달리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욕망이 똬리 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욕망은 독서목록과 관련이 깊다. 그 욕망 때문에 그런 책을 읽었는지, 그런 독서 때문에 그 욕망이 생겼는지, 선후관계는 잘 모른다. 『철학이야기』, 『장자』, 『인간의 역사』. 고등학교 졸업 후 본격 독서를 시작할 때 읽어, 내 사고에 깊이 각인된 세 권의 책이다.
노장사상은 주류사상이 아니라 아웃사이더의 사상이다. 허무와 비관, 냉소와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세상을 등진 은자들의 인생론이다. 전국시대 민중은 전쟁과 착취로 유랑민이 되거나 도둑이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들의 소망은 천하에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제발 자신들을 괴롭히지 말고 잊어달라는 거였다. 이런 민중의 소망을 담아낸 생각들이 노장사상이다. 물론 그때는 이런 사실을 몰랐다. 그냥 마음에 와 닿았다.
미하일 일린의 『인간의 역사』의 원제는 ‘인간은 어떻게 해서 거인이 되었는가?’이다. “아득한 옛날, 사람은 거인과는 아주 다른 난장이였으며,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자연에 순종하는 노예였다. 숲에 사는 동물이나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이 사람 또한 자연 앞에서는 무력하였고 그다지 자유롭지도 못했다.”로 시작한다. 긴 역사의 흐름에서 인간을 바라본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깊어졌다. 그런 만큼 당대의 성공과 실패, 혹은 출세가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아마 그런 인상이 마음속에 각인된 성싶다.
윌 듀랜트의 『철학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철학’은 이해할 수 있는 게 적었지만, ‘철학자의 이야기’는 더없이 흥미로웠다. 어쩌면 머리글인 ‘철학의 효용’에 대한 저자의 견해에 감탄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리가 우리를 부유하게는 못할지라도, 그 대신 우리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우리는 잠시 사상의 성자나 순교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정신의 빛을 듬뿍 받읍시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정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말한 바 있는 ‘이해의 기쁨이라고 하는 가장 고귀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에서 스피노자를 만났다. 스피노자와 그의 사상과 삶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만한 게 많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주제인 ‘행복’으로만 범위를 좁혀 살펴보자.
“나는 영구히 계속되는 지고至高의 행복을 누릴 능력을 발견하고 획득할 수 있을까를 탐구하려 했다. ······나도 명예나 부富에서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만일 진지하게 새로운 사물을 연구하려면 이 두 가지를 얻는 것은 그만 두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지성개선론』-
이어서 스피노자는 명예나 부의 추구가 고통을 야기할 수 있음을 설명한다. 그리고 지식의 추구와 지성의 기쁨만이 영원한 행복임을 주장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명예와 부 추구’와 ‘진리 추구’의 두 가지 길이 있다. 한 길만 선택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진리 추구가 더 영원한 행복을 보장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신은 이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렌즈를 갈아서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 가난은 자발적 가난이었다. 암스테르담의 부상富商 시몬 드 브리스는 스피노자를 몹시 숭배해서 1천 달러의 증여금을 받아주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거절했다. 전통적으로 묘사되어 온 것 같은 빈곤한 은둔 생활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경제적 보장도 있었고, 마음이 맞는 유력한 친구들도 있었다.
유대인 사회에서 파문과 성직 금지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인의 존경을 받았다. 1673년(40세)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철학교수로 초빙되었다. 스피노자는 ‘사색의 자유’의 제한을 우려해 다음과 같은 회답으로 정중히 거절했다. “저는 지금 누리고 있는 지위보다도 높은 어떠한 세속적인 지위도 찾지 않으며,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평온함을 사랑하기 때문에 저는 공적인 교수직을 사양합니다.”
그는 진리 탐구를 위해 가난하고 고독하게 살면서도 행복해 했다. 어떤 사람이, 이성보다는 계시를 믿으면 어떻겠냐고 한 데 대하여 스피노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비록 내가 때때로 오성悟性(지성)으로 수집한 결과가 진실이 아님을 발견하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그것을 불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게는 그 자체가 유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나날은 탄식과 슬픔 속이 아니라 평화와 밝음과 환희 속에서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은 정복이 아니라 과정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 자체가 행복이라는 말이다. 설령 진리라고 탐구해낸 결과가 진리가 아님을 밝혀져도 그 과정 자체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말이다. 행복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스피노자의 이 말에서 발견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자. 스피노자에게 있어 행복은 ‘상태’가 아니라 ‘이행(과정)’이다.
“쾌락(행복)은 인간이 완전성(완성 혹은 성취)이 낮은 상태에서 보다 큰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쁨은 완전성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만일 인간이 옮겨가야 할 완전성을 처음부터 가지고 태어났다면, 인간은 기쁨의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에티카』-
행복이 어떤 상태가 아니라 과정임을 깨닫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일상생활의 평범한 행동 하나하나가 ‘행복 줍기’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행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진리 탐구를 선택했다. 그에게는 공부든 탐구든 명상이든 간에 하루하루 깨달아 가는 것이 곧 행복을 누리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부의 추구가 행복이라고 판단했다고 치자. 그에게도 거대한 부를 이룬 상태가 행복이 아니다. 하루하루 돈을 벌어가는 과정 자체가 행복을 향유하는 일이 된다.
자, 이제 내가 독해한 스피노자의 행복론에 대해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이것은 『철학이야기』의 범위를 넘는다. 『에티카』와 그 해설서 여러 권을 참조했다. 『에티카』의 마지막 문장은 그 유명한 “그러나 모든 훌륭한 것은 드문 만큼 어렵기도 하다 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sunt.”이다. 라틴어를 영역하면, “But all things excellent are as difficult as they are rare.”이다.
스피노자 행복론의 진수眞髓인 이 문장은 세 문장으로 풀어쓸 수 있다.
(이 세상에는) 훌륭한 것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 훌륭한 것들은 (존재는 하지만 매우) 드물다. (왜냐하면) 이 훌륭한 것들을 (이루기가 매우) 어렵기 ( 때문이다.)
‘훌륭한 것들’을 ‘행복’으로 바꿔서 다시 풀어쓰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누구나 행복을 향유할 수 있다. 그러나 행복한 사람은 드물다. 왜냐하면 행복에 대한 앎이나 실천 능력이 부족해, 행복하게 살아가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요즘은, 철학책은 물론이려니와 인문학 서적은 자기계발서나 생활법률책보다 효용이 적다고 뒷전으로 밀리는 세태다. 그러나 과학지식과 더불어 인문학적 통찰이 행복의 필수조건이라는 지론에는 변함이 없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속담은 결코 허투루 넘겨들어도 좋은, 가벼운 말이 아니다.
높은 산봉우리, 구름에 가려져 신비감을 자아내기도 하고 맑은 날 영롱히 빛나며 하늘을 찌르는 듯하다. 거기에만 행복이 우뚝 앉아 있을까? 지고至高한 행복, 최고의 행복은 거기에만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등산하는 사람, 그 봉우리까지 등정이 목표일 수는 있다.
그러나 각자의 환경과 다릿심에는 차이가 있다. 자기한계는 받아들이자. 산정에만 행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산정으로 가는 길가마다 행복이 널려있다. 발치에서 산행을 시작하며 설렘이란 행복을 주울 수 있고, 중턱의 참꽃을 따먹는 행복도 있다. 오르다 힘들면 다리쉼으로 평온이란 행복도 주워 담을 수 있다.
내 다릿심과 내 분복分福을 안다. 산 중간쯤 왔으려나. 몇 발짝 옮기면 피곤해 자주 앉아 쉰다. 영원히 정상을 밟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앉아 쉴 때 눈앞의 바위도 아름답고, 땀 들이는 바람도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행복이 뭐 별 건가, 이렇게 주위에 널려 있는 것 주우면 되는 것을.
때론 쓸쓸하고 우울해져 풀이 죽는 날도 많다. 그러나 으싸, 하고 눈에 힘을 주면, 행복 낱개들이 주변에 널려있다. 이걸 주워 연료 삼고 다시 한 걸음 정상을 향해 내딛는다. 가다가 다 못 가더라도 무슨 회한이 있으리오. 내 능력과 복이 주는 것만큼 행복을 줍고 있다. 장부의 한 살림, 이만하면 족하지 뭘 더 바라겠는가.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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