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 (49)행복 줍기 ①욕망의 정체

조송원 기자 승인 2022.07.21 09:45 | 최종 수정 2022.07.23 10:06 의견 0
금어초

금어초는 세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미모와 해골 그리고 욕망이다. 금어초金魚草가 꽃을 피우면, ‘헤엄치는 금붕어’ 같이 아름답다. 그러나 가루받이(受粉)가 끝나고 꽃잎이 지고나면 둥근 공 모양의 씨방만 남는다. 씨가 익으면 씨방 외피에 구멍이 생긴다. 공 모양의 씨방에 구멍이 몇 개 뚫리면 흡사 해골마냥 괴기스런 모습이 된다.

미모에서 해골로의 변모, 자연의 이치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굳이 자연현상에서 어떤 ‘인간적 진리’를 끌어내려고 한다. 하여 육체적 아름다움은 결국 해골바가지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의 추구나 과시의 욕망, 아름다움을 품으려는 욕망, 헛되고 헛된 그 욕망을 경계할지어다. 대충 이런 식으로 금어초의 꽃말을 붙인 것은 아닐는지.

그러나 욕망이 어때서? 먹고 자고,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 먹은 셈을 치르는 것과 같이 욕망도 자연스런 마음의 작용이다. 차이는 있다. 생리현상은 몸이 시키는 일이지만, 욕망은 마음(정신)이 시키는 일이다. 마음이 시키는 일이다보니, 욕망의 정체를 파악하기 대단히 힘들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한다. 물론 첨단 생명과학에서는 이 자유의지를 부정한다. 마는, 이건 너무 전문적인 이야기가 되니 통념을 따르자.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니, 내 욕망은 내 의지의 산물이 된다. 그런데 이건 우리의 경험칙에 맞지 않는다. 일하던 중 갑자기 친구가 보고 싶다든지, TV를 보던 중 갑자기 안 하던 집안 청소를 하고 싶다든지, 등등의 욕망이 생긴다. 평소 계획하지도 않았고 내 의지가 시킨 일도 아니다. 곧, 내 욕망을 내가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 생명과학도 아직까지는 욕망의 메커니즘 혹은 알고리즘을 풀지 못한다. 분명한 건 ‘나’는 존재하고, 나에게서 ‘욕망’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 욕망은 내 의지로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와 ‘내 욕망’과는 도대체 어떤 관계란 말인가?

욕망은 가치중립적인 말이다.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다. 그러므로 금어초의 꽃말이 교훈적이 되려면 욕망이 아니라, 욕심이나 탐욕으로 해야겠다. 그건 그렇고 ‘나’란 사람, 나아가 인간이란 종에게는 욕망이 발생하게 되어 있다.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무슨 진화적 이점이 있어서일까? 모른다. 그렇지만 하여튼 이 욕망의 실현이나 제어는 행복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예로부터 행복을 논의할 때, 욕망을 상수로 봤다. 그리하여 행복을 얻기 위해서 이 욕망을 ‘채움’으로 얻을 것이냐, ‘비움’으로 얻을 것이냐‘ 의 도식으로 갑론을설甲論乙說해왔다. 욕심이나 탐욕이야 비울 수도 있고, 응당 비워야 한다. 그러나 욕망은 내 자유의지로 발생시킨 것이 아니므로 비우고 자시고 할 수 없다. 내 의지와는 따로 놀기 때문이다. 채움도 마찬가지이다. 욕망은 내 의지가 아니므로 내 형편이나 사정을 고려해 주지 않는다. 성층권을 벗어나 멀디먼 허공에서 아름다운 초록행성 지구를 보고 싶다고 문득 욕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욕망의 주체는 뒷산을 오르기도 힘든 형편이다. 건물주를, 절색絶色을 문득문득 욕망할 수 있다.

행복=소유/욕망,이라는 방정식을 종종 보았다. 욕망은 욕심으로 바꿔야겠지. 지극히 ‘돈제일주의’적 발상이다. 돈은 세상살이에 아주 중요하다. ‘가난이 이쪽 창문을 들어오면, 행복은 저쪽 창문으로 나가버린다.’ 마는, 이 방정식 또한 채움과 비움 같이 공허한 말이다. 돈 부족으로 불행한 사람이 많다. 이 부족이 해소되면,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불행에서 벗어나는 게 인생의 목표는 아니지 않은가.

삶에서 특히 행복에 관해서 돈이 자주 거론 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은 쾌락의 동물이다. 쾌락 없이는 사는 게 시들해진다. 그 쾌락의 교환도구가 바로 돈이다. 정당한 땀으로 돈을 획득하여 쾌락을 소비하면 만사형통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땀만큼만 쾌락을 소비할 정도로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다. 유혹하는 쾌락은 종류가 다양하고, 비싼 것도 많다. 종종 흘린 땀의 범위를 벗어난다. 자본주의 사회는 쾌락을 부추기도록 특화되어 있는 제도다. 무한히 쾌락 소비에 열려 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 많음=행복’이라고 쉽게 착각한다.

기본적인 쾌락 소비와 그에 드는 돈은 행복의 필요조건이다. 문제는 행복이란 그 무엇은 쾌락과 돈 너머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현실이 증명한다.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부유층이나 저명인사들의 물의나 스캔들은 쾌락과 돈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인간은 적응 또는 망각의 동물이다.

빚쟁이가 로또에 당첨돼서 빚에 자유로워진다면 불행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그렇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소형차를 타다가 복권 덕에 제네시스를 타면 행복감을 느끼겠지. 그러나 그 유효기간은 1~2년이다. 직장에서의 승진이나 어떤 목표의 성취, 심지어 사랑의 성취도 마찬가지이다. 유효기간이 결코 복권당첨보다 길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마지막에 놓인 궁극목적을 향해 행동하며, 이 모든 행동이 지향하는 좋음의 마지막 단계가 최고선이라고 한다. 이 궁극목적인 최고선을 그리스어로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 했고, 한국어로는 통상 ‘행복’으로 번역한다.

조금도, 전혀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길어졌다. 그 이유는 다음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고준한 담론으로서의 ‘행복론’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누구나의 ‘행복 줍기’에 대해 지론을 펴볼까 한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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