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욕망 덕으로 살아가는 게 아닐까? 무엇을 욕망하고, 그 욕망을 채우고, 다시 무엇을 욕망하는 게 우리 삶의 과정은 아닐는지. 욕망을 좋게 말하면 ‘희망’으로도 ‘성취동기’라고도 부르고, 나쁘게 말하면 ‘욕심’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희망이나 성취동기나 욕심이나 그 얼굴이 그 얼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욕망의 채움이 즐거움이고, 못 채움이 괴로움이다. 욕망이 없다면 즐거움도 괴로움도 없다. 중립은 없다. 사람에게 욕망은 생래적 절대상수이다. 욕망은 ‘자기복제’(self-replication)가 본질이다. 한 욕망이 충족됨과 동시에 새 욕망이 발현한다. 심지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할 정도로 욕망은 먹성이 강하다.
무료함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은 사람에게 없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함이 있어야 삶이다. 하여 일부러 긁어 부스럼을 내어 그 치료의 시원함에 안도하고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함이 없는 사람은 미랭시(未冷尸, 따뜻한 시체)에 불과하다.
욕망의 불꽃을 잠재우고 마음을 식은 재로 만들려는 수행자들이 있다. 욕망을 제거한 ‘식은 재’의 마음을 왜 욕망할까? 불초의 이해력 너머라서 짐작을 못한다. 다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개인이든 역사든 그 추동력은 욕망이라는 것이다. 욕망이 없는 식은 재는 더불어 사는 너와 나의 사회와는 무관하다. 해를 끼치지 않을지언정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희로애락애오욕’의 집합이 개인의 삶이다. 개인은,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심내면서, 금수강산에서 노닐고 싶어 한다. 그러나 문득 돌아보면 자신이 있는 곳이 적막강산인 경우가 많다. 욕망은 사람을 다그쳐 어디론가로 데려간다. 그러나 그 곳이 금수강산인지 적막강산인지에는 신경 쓰지도 않고, 책임도지지 않는다.
법정 스님(1932~2010)을 수행자로서 존경한다. 그러나 출세간과 세간 사이에는 세상 인식에 차이가 있다. 그의 저서 『아름다운 마무리』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텔레비전 프로나 신문기사로 머리를 가득 채우는 것은, 영양가 없는 음식을 몸에 꾸역꾸역 집어넣은 것처럼 정신 건강에 해롭다.”
이 문장에서 법정의 말뜻을 정확히 짚어내기가 쉽지 않다.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텔레비전 프로나 신문기사’의 해석 때문이다. ‘모든 텔레비전 프로나 신문기사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인지, 여러 텔레비전 프로나 신문기사 중에서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것’만 특정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어느 쪽인가?
나는 텔레비전 수상기가 없다. 신문기사는 일본 극우신문 기사까지 검색해 읽는다. 영국 잡지도 온라인 구독으로 읽는다. 어쨌건 텔레비전 프로나 신문기사는 우리 삶이란 밥상에 차려져 있는 반찬 중의 하나이다. 과식이나 편식이 문제가 될 뿐, 적당량의 섭취는 정신 건강이나 세상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특히 법정은 언론의 ‘세계를 비춰주는 창’ 역할에 대해서는 관심이 덜한 듯하다. 세상사에 가치를 낮게 두는 수도자의 한계라 생각한다.
<때깔 고운 도자기를 보면>이란 소제목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한다.
“요즘에 이르러 이것저것 세속적인 욕심은 어느 정도 빠져나간 것 같은데, 때깔이 고운 그릇을 보면 아직도 곁에 두고 싶은 생각이 인다. (중략) 언젠가는 때깔이 고운 도자기 앞에서도 욕심을 부리지 않고 무심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아마 내 삶도 탄력이 느슨해질 것이다.”
‘그때는 아마 내 삶도 탄력이 느슨해질 것이다’란 말이 가슴에 확 와 닿는다. 나는 때깔이 아무리 고와도 도자기에는 관심이 없다. 용도에 맞으면 그 재질이 플라스틱이든 사기든 상관치 않는다. 그렇지만 두 가지에 대한 욕망에는 중독돼 있다. 몸은 담배에 중독돼 있고, 마음은 활자(책이나 잡지 등등)에 중독돼 있다.
내가 도자기에 관심 없듯, 주위에 이 둘에 중독된 사람은 드물다. 담배를 끊은 친구들은 내 ‘의지박약’을 은근히 조롱한다. 인정한다. 그러나 일상사 세상사에 대해 분노, 혹은 의분을 많이 경험한다. 진정제로 대체재를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심지를 굳혀 마음만으로 진정시켜야 하지만, 의지가 박약한데 어찌하랴.
어렵사리 구입한 책도 다 읽는 경우는 드물다. 목차 살피고, 머리말 읽고, 바로 해설만 정독한 후 서가에 모셔두는 때가 더 잦다. 책에 대한 욕심의 노예일 뿐인가. 그러나 담배를 매일 매 시간 피우듯, 일상의 대부분은 활자를 읽는 데 쓴다. 그러니 활자 중독이 과한 표현은 아니다.
백해무익하고 만병의 근원인 담배와 아직 결별하지 못한다. 영상의 시대에 아직도 활자로 세상과 삶을 읽는다. 눈이 뜨였는데도 자리에서 미적거릴 때, 생각이 담배에 미치면 벌떡 일어나진다. 마음이 느슨해져 일상이 시들해질 때에도 활자로 글쓴이와 대화할 때, 생기가 넘쳐난다.
욕망이 삶의 버팀돌이다. 언젠간 쇠잔해진 몸이 흡연욕구를 사라지게 할 것이다. 눈정기도 없어져 활자 읽을 욕구도 사라질 것이다. 이 욕구의 사라짐과 비례해 삶도 서서히 ‘무화無化’할 것이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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