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톨 프랑스(1844~1924)는 192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 당시 에밀 졸라 등과 함께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며 반유태주의와 반드레퓌스파에 맞서 싸운 사회참여형 지성이었다. 이사도라 던컨(1877~1927)은 아름답고, 현대 무용의 개척자로 불린 재능 있는 무용수였다. 이 둘의 만남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던컨은 당시 인기 있던 우생학 운동을 거론하며 “내 외모와 당신의 머리를 물려받은 아이가 태어난다고 상상해 봐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프랑스는 이렇게 대꾸했다. “좋지요. 하지만 내 외모와 당신의 머리를 물려받은 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게 될까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적이 있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에는 여자 주인공 이사도라 던컨은 그대로인데, 남자 주인공은 192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버나드 쇼(1856~1950)이다. 쇼는 풍자와 기지로 가득 찬 신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독설가毒舌家로 불렸다.
어쨌건 남자 주인공이 아나톨 프랑스든 버나드 쇼든 실화는 아니다. 당시 우생학에 관심이 많았던 사회 분위기에 편승해,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 재미있는 일화가 허구이지만, 생물학 관점에서 프랑스와 던컨 중 누구 생각이 더 맞는 것일까? 둘 다 맞을 수도 있고, 둘 다 틀렸을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이 유전자에 해로운 돌연변이와 최적 이하의 대립유전자를 몇 개쯤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유성생식은 일종의 복권이다. 남자의 좋은 머리와 여자의 미모를 물려받은 아이를 가질 확률은 복권당첨 확률이다. 마찬가지로 남자의 추한 외모와 여자의 아둔한 머리를 물려받은 아이를 가질 확률도 복권당첨 확률이다. 하여 일반적으로 아이는 부모 유전자의 최선의 조합과 최악의 조합 사이의 그 어딘가의 조합을 물려받는다.
아이를 생각하여 프러포즈할까? 아이를 생각하여 프러포즈를 거부할까? 아닐 것이다. 그럼 어떻게 사랑하게 되고, 이별하게 될까? 하버드대학교에서 학부생들에게 사랑과 성역할 등에 대해 강의했던 마리 루티의 ‘이별 규칙’이 떠오른다.
‘사랑이 나를 풍요롭게 한다면 머물러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떠나라.’
작년 빌 게이츠와 멀린다 게이츠는 결혼 27년 만에 이혼했다. 빌은 자신의 트위터에 멀린다와 공동 명의로 올린 성명을 통해 이혼 이유를 밝혔다.
“지난 27년 동안 우리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3명의 자녀를 키웠고,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고 생산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재단을 세웠다. 우리는 그 사명에 대한 믿음을 계속해서 공유하고 재단에서 함께 일을 할 예정이지만, 더 이상 우리 삶의 다음 단계에서 부부로서 함께 성장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보다 더 멋진 이별의 변을 다시 들을 수 있을까? 누구든지 풋사랑이든 참사랑이든 이런저런 계기로 사랑을 시작한다. 그 사랑이 자신을 풍요롭게 하고, 함께 성장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 사랑에 머물러야 하겠지. 마는, 자신을 초라하게 하고 성장할 수 없고 퇴보하는 계기가 된다면, 응당 그 사랑과는 작별을 고해야겠지. 사랑은 속성상 제도의 틀 안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송강 정철(1536~1593)은 56세 때 세자 책봉 문제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되었다. 유배지 강계에서 서러운 귀양살이를 위로해 준 여인이 있었다. 진옥이라는 재기 발랄한 기생이었다. 어느 날 호젓한 달밤에, 정철은 진옥과 함께 시 한 수를 읊는다.
옥이 옥이라커늘 번옥(燔玉. 인조 옥)으로만 여겼더니
이제사 보아하니 진옥(眞玉)일시 적실하네
내게 살송곳 있으니 힘차게 뚫어볼까 하노라
이에 진옥이 상큼하게 받는다.
철이 철이라커늘 섭철(鍱鐵. 불순물이 많은 철)로만 여겼더니
이제사 보아하니 정철(正鐵)임이 분명하네
내게 골불무(풀무) 있으니 한껏 녹여볼까 하노라
송강의 <사미인곡>은 ‘충신연군지사忠臣戀君之詞’라 일컫는다. 충신이 임금을 사모하여 지은 노래라는 것이다. 필자의 역사적 눈으로 보면, 송강은 충신 반열에 올릴 수 없다. 임금을 사모한다는 것도 낯간지러운 아첨으로만 보인다. 문학적 재능을 정치적으로 오용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송강은 동인으로부터 ‘주색酒色을 밝혀 국사를 그르친다’는 공격을 세차게 받았다. 그러나 위와 같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를 노래해 차라리 인간적인 면모가 부각된다. 재상까지 지낸 송강이 강계라는 궁벽한 유배지에서 진옥이란 연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쓰라린 하루하루를 어떻게 견뎌냈을까. 낙백한 한 시절이었을지라도 송강의 진옥에 대한 연모의 정은 <사미인곡>보다는 더 진실이었을 것이다. 비록 ‘순간의 진실’일망정······.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네 사랑도 흘러내린다.’ 세느강은 내일도 흐르지만, 흘러내린 사랑은 역류할 수 없다. 강물보다 긴 사랑은 없다. 어느 날 살그머니 산그림자처럼 방문했다가 도둑처럼 홀연 사라지는 게 사랑이다. ‘필요’를 ‘사랑’으로 착각하지 말자. 필요는 영원하나, 사랑은 순간이다.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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