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 칼럼】리더의 언어, 소인의 말

조송원 기자 승인 2022.09.27 10:12 | 최종 수정 2022.10.02 11:48 의견 0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을 사형집행인들에게 갈가리 찢기도록 넘겨 줄 도덕적 권리는 없습니다.”

‘도덕적 권리’라는 말이 이렇게도 쓰인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이 문장은 글자 그대로 음미하면 ‘도덕적’으로 아주 훌륭한 미문美文이다. 어떤 현실을 표현한 말일까? 실상을 들여다보면, 기본 도덕률을 갖춘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입에 올릴 수 없는 추악한 현실의 악마적 표현이다.

‘가까운 사람들’은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의 4개 지역민을, ‘사형집행인들’은 우크라이나 군인들을 가리킨다. 이 말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했다. 그는 이어,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그들의 진지한 열망에 우리는 부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 말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점령지역 4곳을 러시아로 합병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그 근거로 든 것이 이 말이다. 지난 23일부터 시작된 합병 찬반 주민투표가 진행 중이고, 27일까지 할 예정이다. 푸틴은 왜 합병하려는 것일까? 푸틴이 곤경에 몰리고 있다는 증좌다.(<이코노미스트>(2022.9.20.“Vladimir Putin's situation looks ever more desperate")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전쟁’이 아니라 ‘특별 군사 작전’(special military operation)이라 선언했다. 손쉽게 수 주 내에 점령을 끝낼 심산이었다. 그러나 서방이 제공하는 무기로 무장한, ‘싸울 이유’가 분명한 우크라이나 군의 역공에 패퇴하고 있다. 전쟁이 아니라 군사작전이므로 러시아 법에 의해 ‘징집’을 할 수가 없다. 병력이 모자라니 기껏 용병, 수감자, 점령지역 우크라이나 인들로 충원하고 있다.

한계가 있으므로, 법까지 개정해 300,000 예비군에게 ‘부분 동원령’을 내렸다. 그러나 동원령은 국민들의 분노를 유발한다. 전쟁 중이지만 대부분의 러시아 인들은 직접적인 피해는 없다. 그러나 동원령으로 전쟁은 자신과 가족의 생명과 직결된다. 탈주자가 속출하고 있다. 궁여지책으로 나온 게 합병이다.

‘가짜 선거’(sham referendum)이지만, 점령지역의 주민이 찬성하면 법적으로 러시아 영토로 선언할 수 있다. 그러면 동원된 예비군은 외국의 전쟁터로 보내는 게 아니라, 조국 수호를 위해 지역 이동만 하는 셈이 된다.

그리고 핵무기로 우크라이나와 서방을 위협할 수 있다. 러시아의 핵사용 규칙은 ‘자국의 존재 자체가 위협을 받을 때’이다. 서방의 무기로 사기충천한 우크라이나 군이 뺏긴 땅을 탈환하려고 공세를 취할 때, 서방이 우크라이나를 자제시키라는 신호인 것이다.

지난 21일 유엔총회에서 한일 수뇌가 3년 만에 30분 간 만났다. 그런데 만남의 명칭이 한일 양국이 다르다. 우리는 ‘회담’이라 하고, 일본은 ‘간담’(懇談)이라고 한다. 왜 일본은 격을 떨어뜨린 간담이라고 할까? 일본 신문을 검색해 봤다. 한일관계에 대해서도 비교적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는 아사히신문 주장(2022.9.23.사설)에 주목했다.

“배경에 있는 것은 일본기업의 자산이 현금화될 우려가 있는 징용공 문제다. 일본 정부는 그간 한국정부가 위기회피책을 보여주지 않는 이상, 수뇌회담에 응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취해 왔다. 기시다 정권은 한일관계 개선할 의사를 표시해 왔다. 그러나 구체적인 제안을 받기 전의 접촉을 회담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한국 비판에 뿌리 깊은 자민당의 보수파를 의식한 탓이다.

그런데 한국 측은, 정부 고위자가 일방적으로 한일수뇌가 회담한다고 발표해서 일본 측을 분노케 했다. 한일관계를 악화시킨 전 정권과 다름을 강조하고 싶은 나머지, 상대국을 배려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명칭이 어떠하든, 양 정부는 오랜만에 실현된 수뇌들의 대화를 계기로 현안 타결을 진전시킬 필요가 있다.”

한일관계 교착의 원인이 된 징용공 문제는 일본이 왈가왈부할 게 아니라, 우리의 사법절차를 고분고분히 수용해야 할 사안이다. 한데도 윤 대통령은 이런 외교 사안까지 문재인 정부 때리기 수단으로 사용한다. 하여 일 총리를 만나자고 매달리는 ‘굴욕외교’를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윤 정부가 들어서고는 한-일 관계가 가해자 일본이 피해자 한국에 큰소리치는 관계로 역전돼 버렸다.

도대체 무슨 이득을 보자고 이런 외교 행태를 자행하는 것일까?

윤 대통령은 26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로 출근하면서 기자들의 질문에 “사실과 다른 보도로 동맹을 훼손하는 것은 국민을 굉장히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라고 했다. 맞다. 그러나 보도가 사실이고, 그 사실 때문에 국민이 굉장히 위험에 빠지면 책임을 지겠는가?

조송원 작가
조송원 작가

또 질문에 대답하는 말미에 “나머지 얘기는 먼저 이 부분에 대한 진상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더 확실히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맞다. 진상을 밝혀야 한다. 그렇다면 당사자로서 진상 밝히는 과정에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응당 밝혀진 진실에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윤 대통령의 욕설이나 비속어는 푸틴의 끔찍한 거짓말에 비하면, 차라리 애교 수준이다. 굴욕외교이지만 기시다 수상도 한일관계 개선의 의향이 있는 만큼 징용공 문제를 원만히 해결한다면, 무조건 반일 감정만 내세워 반대만 할 일도 아니다. 사과는 ‘리더의 언어’이다. 잘못을 쿨하게 사과하면 될 일이다.

그러므로 정작 문제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그것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잘못”(논어/위령공)이고, “소인은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꾸며댄다”(논어/자장)는 것이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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