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64)사랑, 그 머무는 자리

조송원 기자 승인 2022.09.21 11:08 | 최종 수정 2022.09.23 16:48 의견 0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표지(부분)

앤 드루얀에게 

광대한 우주, 그리고 무한한 시간,
이 속에서 같은 행성, 같은 시대를
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면서.


30여 년 전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접했다. 관념의 ‘하늘’이 아니라, 실체의 ‘우주’를 만난 것이다. 동양고전을 읽다 보면, ‘하늘’(天)이 빈번히 출현한다. 여기서의 하늘은 보통 지고지선하고 전지전능하며, 궁극의 진리와 권력의 담지자이다. 하여 천제天帝에게서 천명天命을 받은 자가 왕이다. 군자도 하늘이 준(천부.天賦) 품성을 잘 지켜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지향한다. 동의하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움과 경건함을 주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내 위에서 항상 반짝이는 별을 보여주는 하늘이며, 다른 하나는 나를 항상 지켜주는 마음속의 도덕률이다.” 『실천이성비판』에서 말한 이 구절을 이마뉴엘 칸트(1724~1804)는 자신의 묘비명으로 삼았다. 칸트가 언급한 하늘은 관념이 아니다. 물리적인 실체를 말한다. ‘이성’이라는 관념을 탐구하면서,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저 광대한 우주를 ‘놀라움과 경건함’으로 쳐다본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위인일지라도, 시대적 한계 내의 존재에 불과하다. 칸트가 200년 후 현대에 태어났다면, 그리고 그간 우주에 관한 과학적 성과의 세례를 받았다면, ‘반짝이는 별을 보여주는 하늘’이 여전히 놀랍기는 하지만, 종교적 경건함을 갖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말한다.

“만약 우리가 우주 속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졌더라면, 우리들이 행성 위에 또는 그 근처에 가 있게 될 확률은 1조를 1조 배하고 또 10억 배한 것 중의 하나보다 더 작다. 1에 0을 33개 붙인 수를 분모로 하고, 분자를 1로 한 수보다도 더 작은 확률이 되는 셈이다.”

우주적 관점에서 너와 내가 만날 확률은 1/10³³×1/10³³=1/10⁶⁶이다. 게다가 두 사람이 만날 확률만도 이러한데, 서로 사랑할 확률은 ‘1/무량대수’에도 못 미칠 것이다. 그러므로 너와 내가 만나고, 또 사랑할 확률은 가히 ‘우주적 사건’에 비견된다.

이 글 서두의 ‘앤 루얀에게’는 칼 세이건의 기념비적인 저작 『코스모스』의 속표지와 서문 사이에, 한 페이지를 할애한 사랑의 헌사이다. 저명한 천문학자다운 사랑 고백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주의 신비를 벗겨내는 지적 경이로움만큼, 헌사의 감동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숫자의 함정’에 빠지지 말자. 무無나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이라도 일단 실현되면 확률 100%가 된다. 로또 1등 당첨 확률은 815만분의 1이다. 거의 매주 당첨자가 나온다. 당첨자에게는 확률 100%이다. 

사람은 참 묘한 존재다. 기적 같은 일도 현실이 되면, 고양된 행복감은 1년, 길어야 2년 정도만 머문다. 그 다음에는 기적 같은 현실도 일상이 되고, 일상은 따분해진다. 그래서 다시 행복감을 높일 뭔가의 자극을 찾아 헤맨다. 사랑도 그런 것일까?

칼 세이건은 헐리우드 배우 못지않은 미남자였다. 두 번 이혼하고, 세 번째 결혼한 사랑의 상대가 앤 드루얀이다. 그녀는 배우자임과 동시에 사상적 동지였다. 칼 세이건과 함께 반전 운동을 비롯해 여러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 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마치 거센 바람과도 같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의 자서전은 이렇게 시작한다. 러셀은 영국 귀족 출신으로 수학자, 철학자였으며 동시에 사회운동가였다. 화이트헤드와 함께 『수학 원리』를 저술했다. 선배 프레게와 제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분석철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또 러셀은 반전 운동가였다. 1차 세계대전 때 반전 운동으로 브릭스톤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을 비판하며 반대 운동을 벌였다. 핵무장 반대운동도 펼쳤다. 1950년 노벨 문학상도 받았다. 시나 소설을 써서가 아니다. 인본주의와 양심의 자유를 대표하는 다양하고 중요한 저술을 한 공로를 인정받은 덕이다.

러셀은 22세 때 첫 결혼을 시작으로 네 번 결혼했다. 결혼 기간은 첫 결혼이 25년, 두 번째가 14년, 세 번째가 18년이다. 나이 80세에 이르러 이디스 핀치와 네 번째 결혼을 하고, 98세에 사망할 때까지 함께했다. 이 마지막 결혼생활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러셀은 사랑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자서전에 쓴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사랑을 찾아 헤매었다. 그 첫째 이유는 사랑이 희열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얼마나 대단한지 그 기쁨의 몇 시간을 위해서라면 남은 생을 모두 바쳐도 좋으리라 종종 생각한다. 두 번째 이유는 사랑이 외로움, 그 지독한 외로움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성인들과 시인들이 그려온 천국의 모습이 사랑의 결합 속에 있음을, 그것도 신비롭게 축소된 형태로 존재함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추구한 것이며, 비록 인간의 삶에서 찾기엔 너무 훌륭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나는 결국 그것을 찾아냈다.”

‘결국 찾아낸’ 사랑이 80세 때 결혼한 이디스 핀치(Edith Finch, 1900~1978)이다. 28세 연하로 미국의 전기작가였으며, 결혼할 당시 이디스는 52세였다. 칼 세이건과 마찬가지로 러셀도 자신의 자서전 첫머리에 사랑의 헌사를 실었다.

이디스Edith에게

오랜 세월을 두고
나는 평온을 찾아 애썼노라.
환희를 맛보았고, 고뇌도 겪었노라.
광기와 마주쳤고,
외로움에 떨었노라.
심장을 갉아먹는 고독의 아픔도 알았노라.
그러나 끝내 평온을 찾지 못하였노라.

이제 늙어 종말에 가까워서야,
비로소 그대를 알게 되었노라.
그대를 알게 되면서
나는 희열과 평온을 모두 찾았고,
안식도 알게 되었노라.
그토록 오랜 외로움의 세월 끝에.
나는 인생과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아노라.
이제 잠들게 된다면,
아무 미련 없이 편히 자련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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