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선생은 경연에서 진언하기를
“미리 군사 십만을 길러 유사시에 대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십 년이 못 되어 국토가 무너지는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정승 유성룡은 무사한 시절에 병사를 기르는 것은 재앙을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절이 오래 편안하여 게을러진 경연장의 신하들도 모두가 선생의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선생은 경연장을 나오면서 유성룡에게 말했다.
“국세가 누란의 위기인데 속된 유사들이야 시무(時務)를 모르니 아예 바라지도 않지만, 그대마저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훗날 임진왜란 이후에 유성룡은 조정에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돌이켜보면 이문성(李文成)은 참으로 성인이다. 만약 그 말대로 했다면 나랏일이 어찌 이 지경이 됐겠는가?”라고 했다. -율곡전서/권35/행장-
위 글은 동방 18현 중의 한 사람이며, 율곡에게 성리학을 배워 예학파의 거두이자,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영수로 활약한 김장생(1548~1631)이 지은 「율곡행장」 중 일부이다. 율곡의 대표적인 부국강병책인 ‘십만양병설’의 최초 전거(典據)이다.
이 행장을 근거로 ‘십만양병설’이 백사 이항복(1556~1618)이 찬술한 「율곡신도비명」과 월사 이정구(1564~1635)가 찬술한 「율곡시장」으로 이어지고, 송시열(1607~1689)이 찬술한 「율곡연보」로 계승되면서 사실로 굳어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율곡의 십만양병설은 사실이 아니다. 김장생의 「율곡행장」은 변조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인조반정 이후 동인인 유성룡과 이순신을 폄하하기 위해 서인 출신 후인들이 변조한 것이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율곡이 십만양병을 주장했다면 중대한 사안인데도 『율곡전서』 어디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유성룡의 시문집인 『서애집』에도 이에 대한 기사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둘째, 행장의 구절인 “이문성李文成 성인야聖人也”는 원래는 ‘이문정李文靖 성인야聖人也’로 되어 있던 것을 누군가가 변조한 것이다. ‘문성文成’은 율곡의 시호이고, ‘문정文靖’은 송(宋)의 명신 이항(李沆.947~1004)의 시호이다. 이재호(전 부산대 사학교 교수. 1920~2016)에 따르면, 『사계집』의 「율곡행장」 및 『월사집』의 「율곡시장」 및 영조 2년(1749)에 간행된 『율곡전서』 모두 ‘이문정 성인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순조 14년(1814)에 간행된 『율곡전서』에서 ‘이문정’이 ‘이문성’으로 변조됐다는 것이다.
셋째, 율곡에게 ‘문성’이란 시호가 내린 것은 인조 2년(1622)인데, 그보다 15년 전인 선조 40년(1607)에 죽은 유성룡이 율곡을 ‘문성’이라 불렀다는 것은 귀신의 말이라면 몰라도 말이 되지 않는다.
넷째, 서인들이 인조반정을 일으킨 이후에 『선조실록』을 수정·편찬하면서 이처럼 불명확한 사찬(私撰.개인 저작물) 기록을 『선조수정실록』에 인용 전제했다. 그런데 「율곡연보」의 선조 16년 4월조의 이 기사를 『실록』에는 선조 15년 9월조에 삽입했으니, 후인들의 변조와 견강부회를 알 수 있다.
문제는 십만양병설의 진위가 아니다. 율곡은 조선왕조 창업 이래 200년 가까이 지나면서 문벌사족들의 기득권이 비대해지면서 민생이 극도로 피폐해져 말기적 증상을 겪고 있음을 통탄해 마지않았다. 곧, 경장(개혁) 없이는 양병(養兵.군사를 양성함)이 불가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십만양병을 주장했을 리가 없다. 당시 농정의 문란으로 국가 재정이 빈약하여 군비를 확장할 수 있는 국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으므로, 혹 누군가가 십만양병을 주창했다 해도 그건 단지 헛구호에 불과할 뿐이었다.
조선은 농업국가였고, 군사력의 뒷받침할 경제력도 농업에 달린 문제였다. 당연히 군제는 근간이 병농일치였다. 국민개병제가 원칙이었으나 양반계층은 군역에서 면제되었으므로 군사력은 오로지 농민에 의지하였다. 그러므로 농민의 삶이 피폐해지면 온전한 군사력을 형성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었다.
율곡 당시의 조선 인구는 약 8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십만의 군사를 보유하기 위해서는 국민 80명당 1명이 군인이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상비군은 2022년 12월 기준으로 약 500,000명이다. 국민 100명 중 1명꼴이다.
율곡 당시에는 부호들의 토지 겸병이 극심해 농민에게는 농지가 없었다. 문무 권신들과 부호들은 수천 석의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반면, 백성들은 송곳 하나 꽂을 농지조차 없었다. 게다가 권신과 부호들은 군포조차 내지 않았다. 그러니 백성들을 아무리 쥐어짜도 농지가 없어 감당할 수가 없었다. 결론적으로 십만양병은 우선 군비를 마련할 토지개혁(경제개혁)을 단행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국가의 안전보장은 예나 지금이나 군사력과 이를 뒷받침할 경제력, 그리고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외교력에 달려있다. 군사력은 국가 안보의 한 부분에 불과하고, 핵은 군사력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더구나 핵 보유든 핵 공유든 비핵화든 이는 국제역학관계와 국제정세에 달린 문제이므로 외교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한데 윤석열의 외교는 어떠한가?
‘윤석열 정부는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외교·안보정책으로 일관하고, 한반도를 진영대결의 한복판으로 몰아넣고 있’는 형국이다. ‘일본에는 무한하게 퍼주고, 미국에는 알아서 접어주는 ‘호갱’(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손님)외교를 자처하고 있’으니, 참 딱한 노릇이 아닌가.
미국은 공화당이 집권하든 민주당이 집권하든, 일관된 핵확산억제전략으로 인해 ‘핵 공유’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정부와 여당은 한-미 핵협의그룹(NCG) 신설을 “제2의 한-미 상호방위조약”, “한-미 핵동맹 체결”이라고 홍보한다. 이렇게 과대광고를 넘어 허위광고에 가까운 짓을 해도 되는 것인가. 정말 국민을 호갱으로 아는가. 그 실질은 우리의 핵 주권 상실이고 원전 수출 길이 막힌 것이다.
1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국격 상승과 국력 신장을 내외에 자랑했다. ‘눈 떠보니 선진국’이었다. 불과 1년이 지난 지금은? ‘눈 떠보니 검사독재국’이다. 개혁이 필요하다. 왕조국가의 주권은 왕에게 있었다. 일반국민은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국가다. 주권은 너와 나 우리 국민에게 있다. 우리가 개혁주체이다.
나라가 더 망가져 후진국으로 퇴보하기 전에 주권자인 우리가 개혁을 해야 한다. 그 개혁의 방법은? 간단하다. 한 사람 아니 두 사람(?)을 제 자리로 돌려보내면 된다. 깨어있는 시민들은 번뜩 머리에 떠오르는 게 있을 것이다. 그게 필자의 생각이며, 지지한다.
*이 글은 묵점 기세춘 선생의 『성리학개론下』에 크게 힘입었음을 밝힙니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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