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척은 대개 그 사랑을 믿고 방자하여 정치에 관여하면, 기강을 어지럽혀서 나라가 망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을 수가 없으니,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만약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골육의 은혜를 온전하게 하고자 한다면, 그 사특한 지름길을 막고 끊어서 권세를 빌려주지 말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붙이’를 사랑한다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화를 주게 됩니다.” -좌찬성 회재 이언적(1491~1553)이 명종 즉위년(1544)에 올린 상소문 중에서-
‘김건희 명품백 수수’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적절한 처신’이라고 생각한다. 법률지식을 갖춰 ‘김영란법’에 저촉되기 때문에 이렇게 판단한 건 아닐 테다. 아마 우리의 ‘공정성 본능’이 작용한 결과인 듯하다.
소설, 영화, 드라마 등 대부분의 이야기는 주인공(protagonist.선인)과 그 상대역(antagonist.악인)의 대립과 갈등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이며 착한 사람인 춘향이와 그 상대역이며 나쁜 사람인 변 사또와의 대립과 갈등이 『춘향전』의 핵심 줄거리이다.
초등생이 ‘춘향 이야기’를 보거나 읽어도, ‘춘향=주인공/착한 사람, 변 사또=상대역/나쁜 사람’의 구도를 잘 안다. 눈여겨 볼 점은 어린이일수록 ‘착한 주인공’을 ‘내 편’이라며 자신과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춘향이가 곧 나이기에, 춘향이가 신장(訊杖)을 맞을 때 내 마음도 아프다. 이 도령이 변 사또를 응징하고 춘향이를 구출할 때, 내 일같이 기뻐 벌떡 일어서며 환호하게 되는 것이다.
어른이라고 다를 바 없다. 춘향이 편을 들지, 변 사또에 편드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아줌마/아재들의 심심풀이로는 ‘연속극’ 이야기가 제격이다. 이견(異見)이 없어 서로 다툴 일이 생기지 않는다. 모두 주인공/착한 사람 편이니까. 실존 김두한의 역사적 평가가 어떻든, <야인시대>를 시청할 때는 모두 김두한 편이 된다.
영문학자 윌리엄 플레시는 『마땅한 처벌 : 값비싼 신호, 이타적 처벌, 그리고 소설의 다른 생물학적 요소들』에서 우리가 이야기에 몰입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 이유는 협력자의 보상과 착취자의 처벌을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플래시는 실험 참가자들이 타인에게 속임수를 쓰는 사람을 목격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비용이 들 때에도 그를 처벌했다는 실험 결과를 인용하며, 이야기가 우리가 가진 공정성 본능을 잘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집단 내에서 각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피해를 입었을 때는 자연스럽게 팃포탯(tit for tat. 되갚음. 보복.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을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신뢰를 바탕으로 한 규범이 자리 잡으려면, 무관한 제삼자도 기꺼이 개입해 규범 위반자를 제재할 수 있어야 한다.
플래시는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행동에 대응하는 이러한 제삼자를 ‘강력한 호혜자’라 부르며, 다음과 같이 설명하다.
“강력한 호혜자는 개인적인 상호작용만을 고려하지 않고, 사회 집단의 구성원인 타인의 행동에 대해서도 처벌하거나 보상한다.” -데니스 J. 정크/‘이누이트족의 스토리텔링 양육법과 양육의 본질’/KOREA SKEPTIC Vol.36/2023.12.8.-
자신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맹추위의 고통을 마다않고, 자신의 비용과 시간을 들여, 촛불 시위에 나서는 시민들의 행동은 이 ‘공정성 본능’의 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아도 선인/악인을 구별하며, 누구나 공정성 본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유사 이래 모든 인간사회에서 권력을 남용하며, 갑질이 횡행하고, 뭇 비리가 끊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당나라 선승이며 북종선(北宗禪)의 시조인 신수(神秀.606?~706)의 오도송(悟道頌)을 음미해 보자.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 마음은 맑은 거울의 받침대라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 때때로 부지런히 닦고 털어서
莫使有塵埃(막사유진애) 티끌 먼지 끼지 않도록 하라
윤회를 믿지 않기에 불자는 아니지만, 불교라는 ‘큰 가르침’(宗敎)에 종종 곁눈질을 한다. 좁은 소견으로도 이 ‘깨침의 노래’에는 쉬이 접근할 수 있다. ‘맑은 거울’은 생래적인 선/악(혹은 옳음/그름) 구별 능력과 공정성 본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먼지와 티끌은? 불교적으로는 ‘탐·진·치’ 삼독(三毒)이다. 곧, 탐욕(貪)과 성냄(瞋.진)과 어리석음(癡.치)이다.
관견으로 삼독의 으뜸은 ‘어리석음’(치)으로 본다. 지나친 욕심인 탐욕과 자신의 뜻에 맞지 않아 일어나는 화딱지, 성냄의 뿌리가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다. 맑은 거울인 마음에 낀 티끌 먼지가 삼독이다. 만악(萬惡)의 근원이 바로 이 삼독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이다.
이 삼독을 마음에서 ‘때때로 부지런히 닦고 털어내는’ 작업이 학습과 수행이다. 학습과 수행은 동시 상호작용을 하기도 한다. 굳이 구분하자면, 학습은 지식의 정신적 습득과정이라 한다면, 수행은 지식의 실천과정이라 할 수 있다.
지식 습득 과정인 학습을 할 때, 분명히 구별해야 할 점이 있다. ‘선언적 지식’(declarative knowledge)과 ‘절차적 지식’(procedural knowledge)은 지식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불려도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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