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 칼럼】 천량론(天糧論)

조송원 기자 승인 2023.12.25 11:14 | 최종 수정 2024.01.02 12:52 의견 0

역술인 유충엽씨의 수상집 '역문관 야화' 표지


「천량(天糧)이란 하늘이 내려준 양식이란 뜻이다. 천량 속에 들어있는 하늘의 개념은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숙명으로서의 개념이다. 좀 쉽게 말하자면, ‘너는 일생동안 쌀 몇 가마, 고기 몇 근을 먹어라’ 는 식으로 하늘이 명했다는 것이다.

도가 서적에서 천량에 대한 기록을 처음 읽었을 때만 해도, 후세 사람들에게 절약 정신을 가르치려는 엄포이겠거니 하고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주변 사람의 잇따른 죽음을 보면서, 천량이란 섣불리 스쳐지나갈 말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평소 인색하기로 소문 나 ‘유태 상인’이란 별명을 지닌 외삼촌이 한 분 계셨는데, 외삼촌께서는 충청권 일대의 경제를 좌우할 만큼의 재력가였다. 노년에 들어 중풍으로 몸져누워 자리보전을 하게 되었는데, 병 수발이 귀찮던 며느리가 진지를 제대로 드리지 않아 나날이 쇠약해지시더니, 급기야는 종잇장처럼 말라서 작고하시게 되었다.

또 한 사람은 평소 절친하게 지내던 박 사장이었다. 호방한 성격에 술을 즐겨 마시던 박 사장은, 위암 판정을 받고는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하고 고생하다가 젓가락처럼 야위더니 결국 위암으로 세상을 떴다.

두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사람의 먹을 것이 한정되어 있다는 천량론이 무섭게 느껴졌다. 천량의 이론에 의하면, 사람의 식록이 다하고 나면 하늘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교에서는 소식(小食)을 권하고, 절약할 것을 강조한다. 자신의 식록이 정해져 있는데, 먹을 것을 함부로 버리거나 과식하게 되면 나중에는 먹을 것이 부족해서 세상을 하직하게 되는 것이다.」 -류충엽/『역문관 야화(易門關 野話)』(1997)-

‘천량’(天糧), 곧 ‘하늘이 내린 양식’에서 ‘양식’은 ‘인간이 욕구하는 바 그 무엇’으로 치환해도 이야기가 성립한다. 권세, 명예, 사랑 등등의 단어로 바꿔 넣어도 맥락이 통한다. 단순히 ‘먹을 것’에 한정하지 않고, 삶의 알짬에 대한 은유적 이야기로 읽어내야 할 것이다.

‘하늘’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천벌’(天罰)이나 ‘천복’(天福)과 같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인격신(人格神)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세상살이가 고달프거나 성취 욕망에 휘둘릴 때는 초현실적인 존재의 조력을 갈구하는 종교적 심성을 누구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라면, 초월적인 힘(神)이 개입한 흔적은 전혀 없음을 눈치 챌 것이다. 그에 대한 신화(神話)와 설화만 존재할 뿐이다. 심지어 ‘영웅도 자신의 시종(侍從)에게는 한낱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는 영국 속담도 곱씹어 볼만하다.

간단히 개인의 이력을 살펴보면 자명한 일이다.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힘이나 신의 계시 등이 자신의 행로를 바꾼 적이 있던가. 과거 내 자신의 축적으로 오늘의 내가 있고, 오늘의 축적이 ‘내일의 나’가 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자연의 이치만 확인할 뿐이다.

‘하늘’은 종교적 인격신이 아니라, 그냥 ‘자연의 이치’일 뿐이다. 왕조국가에서는 왕이 하늘을 갈음하다. 그러나 민주공화국에서는 국민이 하늘이다. 천량(天糧)에서 ‘양식’을 권세로 바꾸면, 그 천(天)은 국민이다. ‘인사가 검사’라는 말이 낯설지 않듯, 가히 검사 전성시대이다. 그 검사들의 무소불위 권한의 핵심은 기소권과 수사권이다. 그 기소권과 수사권을 누가 주었는가. 하늘인가? 자연의 이치인가?

법적 권한이다. 곧 법이 그 기소권과 수사권을 준 것이다. 그 법은 국민이 만들었다. 구체적으로는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서 법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한데 자신에게 그 권한을 준 국회의원(국민)을 조롱한 자가 국민의 표를 얻겠다고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될 것이라고 한다. 참 요상한 일이지 않은가.

“세상의 모든 길은 처음에는 다 길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같이 가면 길이 되는 것이다.”

한동훈은 자신이 정치적 경험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하여 지난 19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하며 기자들에게 위와 같이 준비된 답변을 내놓았다. 예전에는 정치인들이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라며 윤동주의 <서시>를 오용하는 꼴불견을 더러 연출하곤 했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이나 마찬가지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란 게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고향(단편소설)/마지막 부분-

루쉰을 자신의 이미지 분식용으로 써먹다니, 참 용감하다. 한동훈 같은 사람이 많아져서 같이 가게 되면, 그 길은 어떤 길이 될까? 아찔하다. 맥락도 전혀 다르다. 봉건제의 낡은 사회로부터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려고, 루쉰은 두렵지만 희망을 품어본다. 한동훈이 품은 것은 희망이 아니라 탐욕이 아니던가!

한동훈이 새겨야 할 문학작품은 루쉰의 <고향>이 아니라, 을지문덕 장군의 <여수장우중문시>여야 했다. 그것도 오언절구의 딱 마지막 한 줄!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게나.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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