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보라 외 9편
차 수 민
바다를 좋아하면서
곰처럼 겨울잠 자고 싶다는
삶은 본전치기다 하는 내게
구름처럼 바람처럼
삶은 흐름이더라 하는
보라 옷에 보라 가방
보라 지갑을 즐기는
녹턴 들으며 책 읽다
춤추면 따라 흔들고
날치기로 나도 못 알아보는 내 글을 좋아하는
부딪혀 꿈은 조각났어도
반짝반짝 옥보라.
시서리
첫서리는 계임이가 앞장선 참외밭
중학교 뒤 냇가에서 씻어 먹었다
간짓골 애들 모여
공동묘지 옆 과수원 자두 서리는
별도 숨은 한밤이었다
쌀 포대 들고 알 큰 놈 다 담고
누가 오기라도 할까 봐
잘 익은 자두 한 입 먹을 새도 없이
내달린 한구석
풋것이 반이었다
시줄이 엉키는 밤
별이 총총한데
내 머리 어느 낱말밭에서
시서리 해야 하나.
달걀 반쪽
예쁜 목걸이 좋아하는 숙이랑
내려와서 점심 맛나게 먹겠다고
빈속에 오른 계룡산
어디서 잃어버렸을까 지갑
산 중턱 어묵과 달걀 가판대 앞에서
주머니 가방 털어
달걀 반쪽씩 먹고
기차비 끼니 돈 없어
역 화장실 거울 앞에서 마주 보고 웃다가
전당포에 목걸이 맡겼다
팔지 마세요 찾으러 올 테니
청춘은
어느 불덩이에서 녹고
누가 그 조각 걸고 있을까?
간짓골
한낮
묏등 아래
달맞이꽃
봉선이 옷 단추 밀며 도가 가는 주전자
따랑따랑 점치는 마루
한 김 식힌
단내 나는 개떡에
따닥 둘러앉은 방구석서
종이인형 옷을 오리고
입혔다 벗겼다 한나절
해지는 아궁이 불내가 나면
씹던 껌 붙였다 뗀 자리
어느 벽인가
맴을 돈다.
현철이와 경섭이
점심 먹고 고무줄놀이하면
운동장에서 고무줄 대번 끊고 좋아하던
둥글한 얼굴에 몸짓도 커서 송아지라 불리던 아이
작은 나를 유난히 괴롭히더니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를 싫어한다
자기 자전거를 넘어뜨렸다고
운동장 한구석에 밀치고
날 울리던 같은 반 현철이
그땐 몰랐다
내 동생을 때려
나도 뺨을 갈겼다
아들 목이 돌아가 큰 병원 가야 한다 해서
난 집에서 쫒겨났다
동네를 돌다가 살 들어가 누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경섭이 밥도 못 먹고 물도 못 마실까
지금도 목은 이상 없는지 걱정.
파도를 보며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닌 부산 남아 일해서
이모 집으로 전학 온 아이
도덕책을 빌려주며
도덕책을 받으며
놀러 갈 때마다 공부하던 전교 1등
교과서 빨간 밑줄은 줄자
내 검정 밑줄은 자벌레
삼산중학교 2층
1반 남자 2반 여자
내 이름 부르면
골마루 쓸다 얼굴 빨개져
교실로 내달리곤 했는데
내 성에 그 아이 이름 붙여
머스마끼리 싸움이 나
상처 얼굴로 늦게 들어온 다음 날
택시를 타고 온 엄마
부산 가자는 말에
여기가 좋다 소리쳐도
택시에 밀어 넣자
도망치고 또 도망쳐 울던
얼굴 가린 파도.
구두 뒤에서
법 공부하는
동생 민법 책 모서리
아버지 구두라는 글자
약해질 때마다 보았다는데
내 눈에도 한 켤레
집 떠나 공부하는 딸
회사 낼 주민등록등본
자유수출지역 후문에 넣어주고
돌아서던 아버지
빼입은 양복에
뒤굽 닳아
발바닥이 길바닥
새벽차 타고 오셨을 텐데
그냥 가셨다.
둥근 날
학동띠야
장날 언제고
묻는 것도 이제 싫다
아야 동골뱅이를 쳐주라
장날 자꾸 깜빡한다
거울 옆 삼산 농협 달력
방바닥에 놓고 고성 오일장
1과 6을 고른다
동골뱅이를 쳐주면
하루씩 내가 가위표를 해서
날수를 셀 기다
모르모 니한테 전화할 거마
빨갛고 둥근 산딸기
어머니 눈에 익을까.
5월 6월 달력 넘기려다
움마가 한 번 장날 표시해 보소
내는 모린다 모린다.
고맙습니다
알약을 흰 종이에 하나씩 올려놓는
손이 떠오른다
약방도 없는 시골
탈 나면 달려가는 동네 보건소
중학교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보건소에서 살게 되었다
해주시는 밥을 먹고
블라우스에 구두를 신고 다녔다
학교에서 반공 교육을 받은 날
꿈을 꾸었다
총칼을 어깨에 멘 나는
잡히지 않는 빨갱이 이름을 외치며
뒤쫓다 멀어지자
철컥철컥 자물쇠 따듯
있는 욕을 다했다
솥에 작은 양푼을 넣어 찌면
딸캉거리는 소리도 맛 나는
달걀찜이 오른 아침
선생님은 젓가락으로 밥알을 뜨시며
내 이름 불러
어젯밤
너를 깨워
당장 네 집으로 보내고 싶었다
모르는 척 밥을 먹고
학교 가는 길은 흔들렸다
어쩌다 꿈속 빨갱이가 보건소 선생님인지
오늘 학교가 끝나지 않으면 좋겠다.
대포
고성 사람이 고성을 몰라
모르면 고향을 뺏기는 거지
저 섬은 이름이 뭐지
저 산은 이름이 뭐지
말만 고성 사람이군
대포 바다
숨을 구멍이 없다.
◇ 시인 차수민
1970년 경남 고성 삼산에서 태어나, 경남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 시창작 교실에서 시쓰기를 배우고 있으며, 2020년 공동시집 《양파집》(시학)과 계간지 『여기』(2021) 신인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고성 지역문학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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