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창간호】 신작시 - 하순이, 어거스트 러쉬 등

장소시학 승인 2022.12.22 12:37 | 최종 수정 2022.12.22 12:54 의견 0

어거스트 러쉬 외 9편

 

하 순 이

 

아빠는 천재 기타리스트이자 밴드 싱어
엄마는 촉망 받는 첼리스트
두 분의 만남은 운명이어서
첫날밤에 음악적인 사랑을 낳으셨어
난 에덴동산에서 원장엄마랑 살아
슈베르트 자장가를 들으면
CD플레이어 앞으로 기어드는 나를 보고 
음악가를 예상하셨대
음악학원 선생님도 재능이 있다고 하셨어
곱슬머리가 인상적인 쇼팽사진이 있는 방에서
피아노 연주를 했어
원장엄마는 나를 픽업하는 일 마다하지 않으셨어
누구에게나 사랑을 준다고 강조하시는데
난 사랑도 많이 받고 국가보조금도 많이 받았어

빨간 장미를 단 초록 넝쿨이
소망동 창가를 타고 오를 때
엄마 엄마 부르면
꽃송이는 부푸른 풍선이 되었어
난 피아노 콩쿨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거야
뉴스를 보던 엄마는 영화처럼
나를 한눈에 알아보시겠지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엄마는
장미향이 은은한 향수를 뿌리고
검은 세단을 운전하고 오시겠지

해마다 그늘을 키웠던 등나무 밑에서 
조금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작았던 
내 시간들은 모양도 무게도 없이
공기처럼 사라질거야
내게도 식구가 생겼거든
엄마 엄마 엄마

 

학습지 교사

 

대학 졸업장이 
과속 방지턱없이 통과되었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보다
학습지 공부할 학생이 많아야 했다
교실은 더없이 넓어서 
돌밭 동네를 온종일 다닌 적도 있다

컴퓨터에 다운, 스마트폰에 KO패 한 학생들
엄마는 달달거리지만 서비스직의 꽃은
웃음이었다
용돈 벌러온 게 아니라 생활비 메꿔야 하니까
빨간 색연필은 교사가 몰입한 페이지였다

비 오는 날은 빗방울 먹은 양말이
수업 방 발도장 찍는 저녁
허기가 새치 끝까지 들러붙곤 했다

지금도 교차로 구인난에서
동종업계 최고대우
원하는 시간 자유로운 근무
글귀 보면 쓴 웃음만 난다

 

방학

 

우리들은 출렁거리던 밧줄을 맨다
작아져 버린 교복에 몸을 맞추듯
정해진 교실에 몸을 가두듯
학교가 내 준 시간표 따라
적당히 움직이면 된다
합격 수기의 주인공들은
실패와 슬픔은 말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최선을 다하라고만 한다

어머니의 불행이 내 꿈이었던 적도 있다
공부 잘했으면 아버지같은 사람 안만났다고
공부 속에 필요한 감성은 감추기
천조각 모음으로 재봉틀 돌려
속이 꽉 찬 쿠션을 만드시던
솜을 채우듯 내 꿈도 
볼록하게 우겨 넣고 싶어하시던
그 성적표는 초등학교에서 멈춰 버렸다
눈이 빨개지도록 멍을 때린 스마트폰
잠을 자다 눈 뜨면 꿈이고
꿈을 꾸다 눈 뜨면 책상에서
곰인형은 발로 누르고 있다

 

남강

 

붉고 노란 창들이 닫힌다
강안개가 뿌옇게 차오르는 밭두둑
아버지는 소를 몰고 나오신다 
따라 나온 어둠은 손뼉치며
모래톱으로 달아나고
쇠죽을 끓이던 작은오빠
아궁이 장작불에 
고구마 몇 알 묻으면 
연기들은 오래 허공을 만졌다
고무줄 놀이하던 나는
바지랑대 낮추며 햇살을 거둔다 접는다
호미자락에 피곤을 달고 
바락바락 재첩을 문지르며 불안을
반찬으로 상을 차리시는 어머니
보물찾기 쪽지는 내 손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구부러져 흐르던 강은 늘 내 안에 있다
탱자나무 가시로 주사기 만들던 숙이 언니
바늘 끝만 닿아도 소름돋던 기억
강물 태엽을 감았다 풀었다

 

수료식

 

오빠가 논산 훈련소에 갔다
헬리콥터 맘들이 
훈련소 부근에 월세방을 구해
망원경으로 훈련 장면을 지켜 보고
필요한 물품을 교관들께 부탁하기도
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장관 내정자들의 청문회 때도 
사연 많은 병역 면제 사유가 나왔지만
지잡대 진학해서도 정신 못 차리고
게임 레벨 올리던 오빠는 여친도 없이
국방의 의무 다하러 갔다
논산이 그렇게 먼 동네인 줄 몰랐다
검은 베레모 쓰고 태극기 붙이고 
이등병 계급장도 달았다
피자 치킨 삼겹살 많이
먹이는 게 사랑이라고 믿는 엄마는
별거 아닌 얘기도 안타까워했다
어린이집 다닐 때부터
일터에 나가신 부모님 대신해
오빠는 대장처럼 나를 데리고 학원도 갔다
친구집에 놀러 간 오빠 기다리다
혼자 텔레비전 보며 그림 그려도
현관문 쳐다보는 시간은 길기만 했는데
머리 좀 컸다고 반항하고
컴퓨터 게임으로 밤샐 때는 
저러면 안 될 텐데 걱정했는데
그을리고 핼쓱해진 얼굴 보니까
닭다리 두 개는 오빠 주고 싶었다

 

보호종료아동

 

기억도 나지 않는
보육원 생활
어른들은 나를 버렸지만
이제 마음에서 
이 큰 집을
버려야 할 때가 온다
재석이 형은
고 삼 수능을 치르고
수시 합격해서 숙식 제공되어
4년 유예돼 2인실 쓰겠지
만들기 잘하는 상혁이는
특성화고 진학해
기술 연마하여
구직활동 성공하면
오백만 원이 찍힌 통장과 함께
세상과 맞짱 뜨러 가겠지
여행용 캐리어 작은 박스 하나
열여덟 해 담은 바닥을 짚어 본다

 

고을개 할메

 

자란도 고향인 영감 따라
시집이 뭐 열여덜 무서
세건이 안나서 아무것도 모리고
부모님이 보낸께네 왔지 뭐
섬이라 캐도 섬도 배로 타고 가는지도 
모리고 와 본께네 이렇대
요시는 배도 기계로 돌리는데
옛날에는 노를 젓고 오갔어
비가 와도 몬 가고 바람 불어도 몬 나가제
아무리 개즉어도 도망도 몬갔지
바람이 불어서
고기배 타고 나가도
산신님 용왕님이 돌봔는가
남정네들이 어제 본 거맨치로
다 돌아온다 아이가
자슥들도 이혼 안하고 잘 살고
에슥들도 다 효도해
자랑거리는 거거 밖에 없어

 

회향

여항산 의림사 일주문 지나면
피안에 든 너럭바위
떨구어진 분홍 공양밥 
화르락화르락 둥더렇다

말려 퍼지는 범종소리
산바람 일으키면
구불거렸던 마음은 더 바쁘다
물 말은 찬밥 한 술
법당에서는
또르락또르락 딱 딱
지장보살 멸업장진언
참회합니다 참회합니다

칠성도 독성도 산신도
절 마당 모과도 천 년을
귀 세운 한낮
그늘 짜던 탑도 존다
오백나한도 열반에 들어
뭉툭뭉툭 기도 발원문 수행 중

 

바리스타

 

예원이 똑 단발에는 커피향이 난다
학교에서는 잠만 자서
바리스타 자격증 따러 학원 다닌다
동네 까페에서 알바하며 용돈도 번다
예원이가 커피 내려주며
눈을 반짝이며 커피 이야기할 때
쓰기만한 그 맛은 말하지 못했다
벚꽃이 지는 오후
저녁 급식 급하게 우겨 먹고
달꽁카페 테이크 아웃하러 갔다
발라드 음악이 잔잔한데
예원이는 큰 소리로 주문을 도왔다
부드럽게 부푼 우유거품으로
하트 그린 까페라테 건네며 
오늘은 부모님 결혼기념일이라
장미꽃과 샴페인을 산다고 웃었다
서역국으로 부모님 살릴 약수 찾아 떠난
고전문학 시간에 배운 바리공주 예원이다

 

명자꽃 담장

 

강둑따라 긴 이랑을     
오리걸음으로 고구마 심는다        
봄 햇살은 언 땅을 녹이며
땅김 올리고 손길 닿으면
고구마 순들 쑥덕쑥덕 꽂힌다
어제 밤 화투판에서 잡던 
새들은 모래바람 따라

두둑에 앉아 노는 딸아이
몸에는 닭벼슬이 솟는다
뻘고랑에 빠지는 고무신을
발로 건져 올려 신으며
동네 점방 가는 길
쥐불자국 구불거렸다

물고구마 두고도 목이 메어
헛기침 삼키던 날은
유월 목단 손에 붙어 
전화기 보고 전깃줄에 앉은
까치 오종종 운다
불그스름한 노을 쓰고 오는 딸

 

하순이 시인
하순이 시인

◇ 시인 하순이 
1966년 진주시에서 태어나 경남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2020년 6인 공동시집 《양파집》과 2021년 『월간문학』 청소년시 부문 신인상으로 문학사회에 나섰다. 현재 독서 논술 강사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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