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창간호】 추천시인 - 시인 구자순

장소시학 승인 2022.12.16 16:17 | 최종 수정 2022.12.18 11:27 의견 0

 

우리 남자 외 14편
구 자 순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대산 돌다방 김 양 
불쌍해서 못 보겠다네요
아부지 병원비 동생 학비에 신세 조졌다고
오빠 노릇에 바빠요 
언제부터 누이라고

한밤중에도 달려가요
수도만 고칠까요
거시기도 고치고
청소하고
문단속하고
수박 돈도 가겠죠
그러고도 남은 마음으로
남지 유채 나들이를 가요
 
봄 없이 하우스 골을 
땅강아지처럼 구르는
우리는요
삼 년째 깜빡이는 우리 마루 형광등은요


마누라는
환삼덩굴 풀밭이랍니다
발 밀어 넣으면
발목에 붉은 줄 죽죽 그어진다고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어요
환삼도 어린잎은 
얼마나 부드러운데요

 

말이란 

말이란 눈을 보면서 하는 거지
이름을 부르면 등을 돌려야지 
눈을 마주치면서 
힘든 살이 오늘 하루도 고생했다 
니 덕에 내 산다 등 두드려 줘야지
그게 맞는 건데
우리 집 남자 등은 바위야
불러도 아무리 두드려도 돌아보지를 않아
 
어머님은 할 말은 꼭 하시던데
날아다니는 밥상에도
구석구석 사발 조각 꼼꼼히 치우시다가도
고개 살짝 돌려 먼 산 아마 15도 
투두둑 투두둑 말 내뱉으시고
빨간 바가지 내동댕이치시던데
벽도 알아들으시더라고
소리엔
각도가 있고
크기가 있는 것 같아


문고리에 매달려서 
닿지 않았을까
그이 등이 움찔하려면
대체 몇 도가 필요할까

 

배롱나무

 

양로원 가는 길 가 팔다리 잘린 채 뿌리 칭칭 감겨 던져져 있던, 중앙병원 베트남 일꾼 두세 마디 피떡 세 개 붙일 쓰레기통 봉지 얼음 직접 닿지 않게 간간 소리 전화선에 칭칭 감겨 누워 있던, 연신 붉은 피가 배어 나와 자세히 보면 하얀 피였는지 노란 피였는지 칭칭 새끼줄에 감겨 목을 매 쯧쯧 집어 던져도 질긴 놈이니 곁에 선 구덩이 무덤 아니면 집이겠지 죽음을 사는 건가 그 숲에선 생기는 대로 자라 긴 머리카락 사이로 바람이 지나 둑 걸어 종일 땀에 묶인 머리카락 낱낱 풀고 걸어간 끝엔 노을이 서 있지 당신 눈을 보며 높다랗게 뛰어내리고 싶어 어스름 강도 살점 뜯어 청둥오리를 키워 살점을 뜯어 가며 무언가를 키우는 거 갈 데가 있는 거 누군가를 기다리는 거 간섭하는 거 다들 등을 보이며 걸어가 아무리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도 돌아보지 않아 더 이상은 싫어 1041번 길가에 누워 있었어 아 물론 새순도 내고 그래그래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이라잖아 귀볼 뜯어대던 바람 수천 날이 다 뿌리를 박기 위한 거였지 겨우 발을 내렸는데 이런 이런 꽃까지 피웠는데 잊어버렸어 온몸으로 웃어대고 꽃망울 한두 개 틔운 뒤태 같던, 깨 볶는 일 하나를 시켜도 노랑 노랑 얌전케 볶던 그 계집애를   

 

개도 이름이 있어요 아롱이

 

떨어지면 떨어지고 말면 말고
덜 여문 남강 둑길을  
꼬리말아 혀 빼물고 달린다
트럭에 쫓겨
피할 곳 없는 외길
어둑한 산줄기까지  
비 부슬거리는 마당에서 손들고 서 있어
라고 할 때 그만둬야 했었어
웃청 마루 됫병 소주를 
밤마다 한 잔씩 훔쳐 먹었지
줄과 함께 마른다는 수박 돈은
은하수 건너 은하수다방으로 마산으로 흐르고 
다방 여자들은 왜 다 불쌍한지 지가 아니면 안 되는지
밭둑에서 논바닥에서 쉼터에서 
맷집 좋은 마누라였지
맞을 짓을 했겄지 오데 여자가
술 처먹고 오줌이나 싸고 
수박 줄 마른지 온젠데 


하우스 열두 동 쑤씨기 그런 쑤시기가 없는 기라
말질은 쿨럭쿨럭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엉머구리 아들은 
등 돌리고 앉아 
텔레비전 무한도전 속으로 빠져 달리고
힘 떨어지면
비켜 앉아 
가쁜 숨 고르면 그만이지만 아롱이
멈출 수 없는 트럭은 
곤두박질 덜커덩 

 

분침 속에 밀어 넣었다

 

안 떨어진다 6시 일어나 일어나 7시 일이삼 번 눈곱 떼고 대강 밥 먹고 트럭 시동 걸면 8시 도시락 일 번 중학교 학교급식 이 번 초등학교 눈칫밥 삼 번 정환이네 맡기고 8시 30분 하나네 육묘장 커피 한 잔 수박 모종 접붙이지 10시 우유 하나 화장실 한 번 접붙이면 12시 후다닥 집 가서 아침 설거지하고 서서 한 술 밀어 넣고 다시 일터 1시 접붙이고 우유 하나 이백오십 원짜리 단팥빵 하나 화장실 한 번 5시 30분 삼 번 찾아 집에 내려놓고 저녁 차려줄 시간은 없고 6시 작업장 잔업 식구 많은 날은 짜장이나 우동 오늘은 컵라면 하나 어김없이 막내 배고프다 전화 악악대고 입은 듣고 손은 접붙이지 일 많으면 열 시 오늘은 아홉 시 저녁 해서 먹이고 설거지 밀어 놓고 막내 안고 동화책 세 권 읽어주면 일곱 권 더 들고 오지 혼자서는 절대 읽지 않지 씻기지도 못하고 재우면 10시 30분 달에 15만 원 청소 부업까지 끝내고 돌아오면 다시 1시 
 
아이들은 뒤죽박죽 자고
벗고 누우면
꾸게꾸게 밀어 넣었던 
봄이
베개를 적셔

 

간혹 눈물이

 

하우스에서 혼자 수박 순을 치다 보면
얼굴 살은 아래로 흘러 딱딱해지고
머리는 녹슨 경운기가 된다 
 
일터를 옮겼다 
목 까딱 살짝 미소 인계 실행 보고
같이 일하는 게 아팠다
 
얼굴은 일곱 달 붙들고 다니고
사람들은 붕어 입 뻐끔거리고 
쇠 깎이는 소리에 귀가 찢어질 듯해도  
머리를 돌려야 했다
 
아이도 그랬나 보더라
오줌도 바지를 벗어야만 누던 아이는
처음 간 학교에서 
똥을 오줌을 참고 
집까지 와서 후다닥 누는데


골목길에 싸기도 했나 보더라
엄마는 일 나가고 없는데
 
학교에서 문 잠그고 울고 있다고 전화가 왔다
아무리 달래도 나오지 않는다고 
동네까지도 못 갔나 봐
일터에 매어 쩔쩔매다가
달려가던 그런 날
씻기고
괜찮다고 꼭 안아주지만
참 니나 내나 싶었다

 

만 발

 

꽃이라곤 감꽃이 전부라서
봄조차도 늦던 남강 가 성당마을
여자는 멍에를 메고 
시아배는 뒤에서
고삐 잡아 이랴 좌라 쫓으며 
비틀베틀 납닥밭 갈지
4월 바람이 휘잉 돌아
눈은 갈지자를 걷는데
쎄 길이는 아무리 쏙 빠져도 반 뼘
한 발은 여덟 뼘 반
밭은 저 멀리 끄트머리를 보이는데
쎄가 만 발이나 빠지려면 
얼마나 더 가야 할까

 

알지 못했다

 

우리라는 말이 입에 붙어서 나라 동네 집 남편이 우리였고 아이가 다 우리였다 모가치 없이 먹게 하려고 밥그릇도 정하지 않았다 통닭 한 마리 놓고도 막내는 누나 둘이 다 먹는다고 징징댔다 먹는 것만 보면 그랬다 우는 건 복 달아나는 일이라고 밥상 밖으로 쫓아냈다 매를 들었다 그게 울 일이가 
 
밤에 일한다고 
하루 한 끼밖에 못 챙겨 먹이던 아이들 
어쩌다 먹게 된 통닭 
입도 작고 손도 작은 게 
얼마나 울 일인지

 

아이는 꿈을 왜곡해

 

엄마와 오빠는 모시옷 입고 한낮 누대에 누워 부채 바람에 더위나 쫓고 주인집 종 같은 예닐곱 살 배기는 키보다 큰 들통 나리비 서서 새치기 북새통에 이리 툭 저리 툭 하며 동이에 물 채웠어 엔가이 높아야 말이제 부엌 턱에 걸려 넘어졌지 앤데 무릎 까지고 눈앞에 별이 왔다 갔다 하는데 볕 들지 않는 부엌 바닥에 물 쏟았다고 칠칠치 못한 것 니 옷 벗어 닦아란 말 새파랗게 날아오데 어금니 앙다물고 무릎에 피나든 말든 아침에 입은 스웨터 새빨갛게 핀 동백 모가지 떨어지던 말던 흥건한 구석 물까지 자근자근 닦았어 닦아라 해서 닦았는데 우레를 치시데 저 저 저년 하면서 말야 곰방내 나는 부석 물로 부아 돋운 것도 모자라서 속에 천불을 지른다고 그 작은 아를 안 죽을 만치 빗자루 몽뎅이로 잘못했다 싹싹 빌던지 도망이라도 가면 와 지가 맞을 끼고 입 꼭 다물고 버티면서 매를 버는데 그래도 섬뜩한 기 벌말은 다시 못하겠더라고 간간 말씀하시지

커서 엄마가 되고
기억 속 엄마보다 더 나이가 들 때까지 
아이는 
모시옷과 스웨터에 갇혀 있었어

 

한 이불에도 있는 자리

 

리모컨 꾹꾹 대며 돌아눕는 
텔레비전 앞은 그의 자리
아버지 어머니께 상처 입히고
찾아간 그 곁 내 자리 
 
닿고 싶어 건네던 발목을 탁 치데
부르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발모가지가
이후론
내밀지 못하겠더라
 
아이 낳은 몸이 돌아오고도 
열 달을 찾지 않다가
어디서 바람이 불었는지
그런 밤엔
손목이 건너와
자기 자리로 끌어 올리지 
건너가는 자리는 새로운 일터
수를 세고
리듬을 타고
눈은 듣고 귀로 보고 확인하지
아침 밥상이 나뒹굴지 않으려면
신호가 올 때까지 
쉴 수가 없지

 

돌개바람

 

그 나물에 그 밥
아버님 싸우고 집 나가 쉼터에 주무시고
어른이 안 들어오셨는데 처자빠져 잔다고
어머님은 
닭 울기 전부터 방문 앞에서 꽁창꽁창 
우리 집 남자는 
아침상 반찬 타박 딱 맞는 말이라서
 
손찌검 오고 가는 하나 둘 셋
주먹 오고 코
피 쏟으며 엎어지던 등 
위로 발길질 
그렇게 왔다 
 
허연 낯빛으로 불었다
책상 옷장 비디오 오디오 텔레비전 치고
그릇장 냉장고 치고 
전기세 아깝다고 쓰지도 못하게 하던 세탁기 치고
슥 일어나더니 
창문 창창 하나 둘  
유리 문문 서이 너이 

신혼 사진까지 휘감아 올려 땅에 때기를 쳤다 
붙들려다가는 말려 올라가 
어느 논 구렁에 처박힐지도 모르는 바람
 
우는 아이 품에 안고 
쳐다보고 있었다 
지나가지 못하게 차 열쇠 쥐고 
부은 코 
피 닦으며 서 있었다

 

한가위

 

웃마을 석산띠기 달덩이 같던 아들 
 
여자가 뭐라고 기찻길에 누워서는 기차가 뛰어들고 쉰둥이 허벅지를 먹어대고 못질도 할 수 없는 관에 누워 큰 덩어리 똥을 누고 여자보호사 관절 뚜뚝이면 자지는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허벅지에서 통증이 자라고 나락 그루터기에 이삭이 자라고 조금씩 자라고 아무리 자라고 자꾸만 자라고 엄마가 자라고 도무지 자라고
 
뒷동산에 떠올랐다 왜 아직 안 와 엄마 

 

응급실

 

내한테미안타잘못했다한마디는하고가야제이리가는기오데있노이래는내못보낸다내한테잘못했다말한마디하고가란말이다이런기오데있노이런기
 
복도가 뒹군다 말 반 울음 반 
 
아침 마산 동네
단풍 덜 든 얼굴에 쓰레빠
머리에 새집 짓고
자주 길가에 앉아 있던 현지 엄마 
 
재수 없구로 여편네가 아침부터 쫑알댄다고
트랙터로 새집 담 밀어 버리곤 하던 남편 
 
밤놀이 돌아오던 성산 모퉁이에서
핸들 채 꺾기도 전에
도랑으로 그대로 떨어져 
목이 꺾였단다
직진만 하더니 기어이

 

장마비

 

나를 사랑하신다 나를 사랑하신다
우당탕 탕탕 창밖에 내리꽂힌다  
이런 꼴 보려고 니를 키운 줄 아나
언제 나를 낳아 달라 했나
꼬리 물고 세차게 내린다
서른 청상을 입에 달고는
바람 살에도 상처가 나고
원하는 게 있으면 특히 아팠던 엄마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다고 연락받고 뛰어간 요양원
양포 둑에서 찾았는데 
물이 마알간 기 무서버서 못 죽겠더라고 
죽어야 니가 편할 낀데 하신다
집에 담겨 있으면 가스 불이 겁이 나고 
문을 나서면
비밀번호를 누설하고 다니시는데
되오지도 못하시면서
니하고 살모 안되것나 하신다
맡기고 
돌아오는 창밖 
따르릉따르릉

 

지 꺼

 

내캉 너거 아부지캉 초봄 땅강아지처럼 푸실거리게 땅 만들고 질삼하고 오비 짜서 한 모타리씩 늘린 논밭인데 그거를 너거 할아부지가 큰 손주라고 끼고 다님서 다 지 꺼라고 했던 갑제 지 하나 빼고도 새끼 넷이나 되는데 우찌 그기 다 지 껀고 욕심이 목까지 차갔고 더런 놈 쌀이고 양념이고 철철이 보내도 큰 아라 믿고 틀니 하게 돈 좀 보내도라 캤더마 그 말도 그냥 했음사 올매나 애럽게 입을 뗐는데 고거를 고거를 그해 딱 고춧값 쳐서 보내는 기라 큰 자슥은 하늘이 낸다더마 말짱 황이다 케라 저 건네 감나무밭 팔 때도 그렇제 지도 조금 사 넣었지마는 내가 넓힌 마늘밭이다 아이가 고거를 지가 싹 팔아 치우고는 달다 씹다 입 한 번 달싹 안 하데 그기 말이 되나 내 인자 내놔라 칼끼다 복장이 시커먼 놈이제
 
한 낮 땀 뻘뻘 
매미 우신다

 

 

추천사

희로애락의 망망대해로


이 승 하 | 시인·중앙대 교수


한자어인 신인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新人’은 시단에 새로 나간 새내기라는 뜻이지만 신의 역할을 분담하는 인간이라는 ‘神人’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인간은 언어를 만들어내 구사함으로써 바벨탑을 쌓았고 소돔성을 만들었다. 그런데 음유시인이 나타났다. 배짱이 같은 가객이 나타났다. 신과 인간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하는 이들 존재가 없었더라면? 구약의 시편이나 화엄경은 우리를 시간의 제한성을 넘어 영원의 제단으로 이끈다. 시가 없는 세상에는 숭고미도 골계미도 없는 것이다.

구자순의 시를 읽으면서 이런 엉뚱한 말을 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 편편의 시에 유머가 있는데 유머 속에 애잔한 슬픔이 느껴진다. 진한 사투리 속에 휴머니즘이 배어 있다. 생의 실존적 비극성을 민감하게 느끼고 그것을 언어로 구조화하는 시인이 없다면 세상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인 것이다.

구자순의 시는 관념이 아니고 일상이다. 한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고 정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시골사람 혹은 고향사람들 이야기다. 주름살 깊은 그들의 초상을 앞으로 계속 그려 나갔으면 좋겠다. 그런데 초상화 그리기는 자칫 잘못하면 동어반복을 하기 쉽다. 투고작 15편은 다행히도 조금씩 다른 방법론으로 그리고 있다. 인류의 생존이 막막한 이 팬데믹의 시대에 큰 위로가 되는 시편을 읽었다. 지구상에 마냥 행복한 인간은 한 명도 없다. 생의 희로애락에 대한 천착을 더욱 다양하게 펼쳐 보일 것을 기대하며 대한민국 시단이란 망망대해로 구자순이란 일엽편주를 띄워 보낸다.

 

추천사

삶의 회한과 긴 여운
- 구자순의 「우리 남자」 외 14편


강 연 호 | 시인·원광대 교수


우리는 지난 세기까지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로서의 문학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는 문학의 입지마저도 흔드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 한때 예술이 대중을 외면하고 고답적인 자기 세계를 고집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대중에 의해 예술이 소외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 바탕에는 물론 활자문화의 쇠퇴와 영상문화의 득세라는, 디지털 기술 혁명이 촉발한 오늘날의 변화 양상이 자리잡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언어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시를 읽고 시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반갑고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시가 세상을 직접 변화시킬 수야 없겠지만 그나마 일상의 지친 삶에 대한 위로와 반성적 사유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시의 존재 의의는 인정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구자순의 「우리 남자」 외 14편은 상처뿐인 일상의 삶을 묵묵히 감내하는 자세를 견지하면서도 동시에 현실의 억압에 대해 은근하면서도 분명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의연함도 보여주고 있다. 가령 표제작 「우리 남자」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억압에 짓눌려 살아가는 여성의 삶을 짐짓 농이 섞인 가벼운 항의의 어조로 형상화한다. 작품 속에서 ‘우리 남자’는 다방 아가씨에게는 오빠 노릇에 바쁘면서도 집안일과 아내에게는 무관심하거나 아예 면박을 주는 우리네 중장년 남편의 전형적인 행태를 보여준다. 한마디로 말해 마누라는 거칠기 짝이 없는 『환삼덩굴 풀밭』 이어서 『발목에 붉은 줄 죽죽 그어진다』는 식이다. 이런 남편에 대한 화자의 불만과 하소연은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장년 여성의 회한처럼 일반화되기도 한다. 물론 이 작품의 묘미는 이런 남편에 대한 화자의 저항이 노골적이지 않고 은근하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 은근함은 그러나 어떤 직설적 항의보다 울림이 깊다. 이러한 울림의 깊이는 가령 그 거칠기 짝이 없는 환삼도 “어린잎은 얼마나 부드러운데요”라는, 다소곳하면서도 올곧은 항의의 결구를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

표제작이 보여주고 있는 가부장적 남편에 대한 항의와 하소연은 다른 작품들에서도 거듭 변주되고 있다. 가령 「개도 이름이 있어요 아롱이」에서 남편의 폭력과 외도를 술로 달래며 감내하는 아내에 대해 오히려 “맷집 좋은 마누라”라거나 “오데 여자가 술 처먹고” 등으로 모독하는 장면을 통해서도 비슷한 정황을 짐작하게 한다. 작품 「말이란」에서 “말이란 눈을 보면서 하는 거지”라는 당연하면서도 마땅한 규정을 통해, 정작 눈을 마주치기는커녕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 남편의 태도에 대한 지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배롱나무」는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이라는 가부장적 관용 표현을 굳이 상기시키지 않더라도, 소녀시절의 호들갑과 웃음을 잃어버린 화자의 회한 섞인 한탄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이밖에 「한 이불에도 있는 자리」나 「돌개바람」 등의 경우도 비슷한 정황을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화자의 삶은 「간혹 눈물이」에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급기야 바지에 배변을 하고 울고 있는 아이를 위로하면서 “참 니나 내나 싶었다”라고 한탄을 내뱉는 장면을 통해서도 되풀이된다.     

구자순의 작품들은 사실 여성의 권익이 이전에 비해 많이 신장되고 자기 주장도 내세우게 된 오늘날의 추세로 보면 어쩌면 다소 시류에 뒤떨어진 신세 한탄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또한 우리의 가부장들이 위세를 내세워 자신의 비루하고 초라한 면모를 겨우 감추던 시절에 대한 회한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 새롭지 않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단적으로 말해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들이 시를 통한 하소연에 그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문제 제기나 항의의 언어가 너무 즉각적이라는 아쉬움도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작품의 주제가 전하는 울림의 진폭을 어떻게 하면 더 강렬하고 깊게 표출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언어적 고심의 흔적일 것이다. 그럼에도 구자순의 작품들은 삶의 질곡을 꿋꿋하게 감내하는 자세를 작품들 곳곳에서 소박하면서도 인상적인 여운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다. 한을 한으로 삭이면 더 깊은 회한으로 남을 것이다. 어쩌면 신산스러운 삶에 대한 회한을 짐짓 농으로 눙치는 데서 우리는 겨우 그 회한으로부터 한 걸음쯤이나마 비켜설 수 있을지 모른다. 구자순의 작품들은 이에 값한다.

 

 

소감

잘 늙어가는 꿈을 꾼다


구 자 순


처음 글을 쓴 건 일상에 대한 줄글이었다. 그때 내게 글을 쓴다는 일은 아이를 학교에 실어주고 돌아오던 성당고개 깨지 않은 감나무 밭에 내리던 햇살 장막 같은 거였다. 그 너머에 뭔가가 있는 듯 가슴이 설레고 내가 살아 있구나! 안심이 되기도 하고 슬픔은 흐르고 있는데 말라 느낄 수조차 없던 그 강에 몸을 담가 젖도록 도와주는 고마운 것이었다.

내게 글은 소통이었다. 많은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어서 감정 표현에 인색한 부분도 있지만, 혼인 생활 중 처음 십몇 년은 어른 사람들과 말을 거의 나누지 못했다.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어른께서 마실 나가는 걸 싫어해서였다. 간혹 사람들과 마주치면 단답형의 말을 나누긴 했지만 그때는 몰랐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나서야 사람들과 긴말을 나누는 데 문제가 생긴 걸 알았다. 말 하는 게 어색하고 단어는 생각나지 않고 버벅거리고 순서가 맞지 않고 연결도 되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 얼마나 못나 보였을지. 그런 내가 보기 싫어 사람들과는 살짝 웃음만 나누었고 무표정에 혼자 앉아 생각에만 잠겼었다. 그럴 땐 생각도 한 부분에만 머무른다는 걸 또한 몰랐다. 그 모습을 처음 봤던 어릴 적 친구는 무슨 일을 당해 틀림없이 혼이 나갔지 싶더란다. 그러다가 글을 만났다. 어른들이 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가능했지만, 일상을 쓰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나는 이런 삶을 살고 있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가치 있는 사람이다.’ 그런 마음으로. 사람들은 내가 나누는 일상에 대단하다 힘을 주었다. 정말 내가 대단한 일을 치르고 있는 사람 같아 힘이 났다.

글에도 형식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다듬어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시를 만난 자리가 남들과는 많이 다르지만 시는 내게 머리 기계를 돌리는 윤활유였다. 어느 날 말 한 줄기가 닿은 느낌, 어! 지금 무언가 나를 치고 지나갔는데 하는 생각, 그 생각을 알아채고 시작했던 게 시를 외우는 것이었다. 시는 짧지만 한 편의 서사여서 머릿속에 따라가는 것이 수월했기 때문이다. 차츰 외우는 힘이 늘어났고 내게 다른 이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굳었던 머리가 돌기 시작했고 말도 순서를 찾게 되었다. 말은 참 쫀득하고 맛있더라. 말처럼 글도 쫀득하고 찰지기를 원했고 말과 달리 쉬이 사라지지 않기를 원했다.

목까지 차서 넘칠 듯 찰랑대던 저수지 하나 내 안에 있었다. 들고 나는 물길이 없어 들끓고 있었다. 그러다 썩는 내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한참 시간이 지났다. 글을 만났고 글이 물꼬를 틔웠다. 작은 구멍이었지만 한번 터진 물은 거칠게 쏟아져 나갔다. 지금은 그 땅이 늪처럼 남았는지 아니면 바닥을 드러내고 말라 쩍쩍 갈라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나 아는 건 슬픔은 습관이어서 그 바닥을 드러내고 찰랑대던 물이 다 빠져도 여전히 헤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는 말도 취하는 행동도 아직 그 물에 담겨 있다. 글을 쓴다는 건 내겐 숙제 같은 거다. 남들에게 어떤 의미, 어떤 가치, 어떤 역할로 다가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본다. 그렇지 않아도 살아낸다고 다들 힘이 들 텐데 힘을 보탤 말 한마디 건넬 여유도 없고 나오는 건 다 넋두리인데 다른 사람들이 그런 글을 보면 얼마나 힘이 빠지고 도망가고 싶을까 얼마나 읽기 싫을까 하는 생각에 글을 쓰지 말까? 앞이 캄캄한 적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아침에 눈을 뜨는 게 싫었던 그때는 말라 있어 몸을 담그지 못하던 그 슬픔이 더욱 더 힘겨웠다는 생각, 물기 충만하게 잠겼을 때 얼마나 위안이었는지를 생각해 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여러 감정이 필요한 게 아닐지. 어떤 이는 기쁨을 행복을 사랑을 우애를 노래한다면 어떤 이는 슬픔을 아픔을 힘겨움을 더러움을 노래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하는. 

나는 오늘날 농촌이란 지역 문화에 몸담고 사는 육십을 바라보는 여성이다. 혼인하고 들어온 지는 30년이 되었고 그중 반은 부모님을 모시고 농사지으며 아이를 키웠다. 내가 쓰고 있고 앞으로 쓸 이야기는 이런 여자들의 이야기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고 여성들의 삶이 많이 나아졌다고 말하는데 마음만 먹는다면 할 수 있는 게 아주 많아졌다고 말하는데 우리 삶은 왜 나아지지 않는 걸까? 마음이 없어서? 게을러서? 아닐 거다. 선택한 삶 자리에서 살아 낼 건지 말 건지를 고민하다가 살아야지 결정하고 나면 나를 바꾸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우리들 삶터다. 이제 풀어내고 싶다. 지금은 비었지만 쏟아져 흘러나간 찰랑대며 들끓던 이야기를 쓰고 싶다. 굳은 기억에 몸 담그고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이 습관을 벗고 내 육십 이후를 긍정하기 위해. 같이 공감하고 힘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참으로 좋겠다고 생각한다. 일단 나에게라도 다독임을 주고 싶다. 그러한 마음으로 우리를 쓰고자 한다. 이제 시작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까지 다 흘러나가고 난 어느 날엔가 찰랑대던 슬픔이 메마른 그 땅에 씨앗 하나 싹 틔우기를 기대한다.  

 

해적이


1963년 경남 진주시 신산마을(지수면 숭내리)에서 태어나다. 홍역 백일해 들을 심하게 겪다. 
1970년 봉원초등학교(위탁 중안초등학교)에 입학하다. 남자 아이들과 경쟁, 고무줄 끊으면 끝까지 쫓아가서 응징하다. 
1976년 진주여자중학교 입학하다. 가장 공부를 열심히 했던 시기다. 진주여고 언니들은 천사라고 세뇌당하다. 그 영향으로 천사가 되고 싶어 하다. 
1979년 진주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다. 진주에서 고등학교 입시가 있었던 마지막 해다. 나는 누구인가 고민하고 찾아 들었다 미로에 빠지다. 
1982년 부산대학교 간호학과 입학하다.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게 싫어 여섯 달 열심히 공부해서 얻은 결과였다. 
1989년 간호사 자격증을 얻고 의령 성당마을로 시집오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여성 농민활동가로 들어섰는데 어른들 모시고 아이 키우고 농사짓고 활동가 남편 뒷바라지하는 게 일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2000년 시집살이와 농사일 그리고 아이 키우는 일을 혼자서 감당하는 게 힘들어 짜구가 나다 
2002년 시어른이 돌아가시고 농사일을 접고 육묘장에서 일하다. 간호사 자격증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일자리를 찾아다니다. 
2003년 산부인과 간호사로 처음 일을 시작하다. 경력 없고 나이 많은 간호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밤에 신생아 관리가 유일했다. 아이들 재우고 창원까지 가서 밤새 일을 하고 새벽에 의령으로 퇴근했다. 10개월 뒤 직책이 폐지되다.
2004년 함안 중앙병원에 입사하다. 처음으로 조직 생활을 시작하다. 보증할 수 없었던 경력이었는데 10개월 동안 밤마다 산부인과 출근 모습을 보고 약간의 믿음을 가진 지인이 소개해서 시작하게 되다. 조직 생활을 한 적이 없어 많은 문제가 발생했지만 해결을 위해 노력하다. 2년 6개월 일을 하다. 밤 근무가 많은 근무 형태가 아이들에게 불안요소여서 사정을 알게 된 지인 소개로 근무지를 옮기다. 
2007년 노인요양원에서 간호팀장으로 일을 하다. 복지팀과 일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다. 
2007년 9월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시창작 수업을 등록했다. 근무지에서 시간을 만들기 어려워 중도 포기하다.
2008년 3월 다시 등록을 하고 시간 조절에 성공해서 그 이후 죽 붙어 있다. 직장에서 눈치는 좀 받다.
2016년 말에 요양원 퇴직을 하고 2017년 경남대학교 대학원 어문학부에 입학하다. 얼굴이 반짝이고 빛나던 때. 세 번째 도전이었다. 아이들 공부시켜야 하기 때문에 내 공부까지는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막차다 싶어 밀어붙이다.
2020년 2월 석사 학위를 받다. 제목은 「나라잃은시대 언론에 담긴 의령 지역」.
2020년 9월 다시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 시창작과 지역문학과실천 강좌에 등록해 오늘날까지 공부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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