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창간호】 신작시 - 박해숙, 단팥빵 등

장소시학 승인 2022.12.20 16:46 | 최종 수정 2022.12.22 12:56 의견 0

단팥빵 외 9편

박 해 숙

 

새벽 한 시 
마지막 배를 기다리는 등대인 양 
버스정류장 빵집
단팥빵 하나
만삭인 배로 담보 없는 대출을 찾아
버스를 타고 다니던 일도
20여년 전으로 물러나 앉았는데
우유와 빵에 녹차라떼 곁들여놓고
코끝 시린 몸살기를 젓는다
막내 스무 살만 넘으면
스무 살 막내는 닻 내리는 항구
허리는 아직
아프다는 말을 못한다

 

왼쪽에는

 

상고머리를 깎을 때면
길을 내는 쪽은 대개 오른쪽이었다
각도와 높낮이를 정하고
성근 빗살로 첫 모양을 잡아갈 때는
열아홉도 이랬을까
그러나
오른쪽 같은 왼쪽은 없었다
10년 동안
귀에서 귀까지 층층이 길에서
몇 번이고 거울 속을 들락거렸지만
샴푸를 하고 온 마지막까지 놓을 수 없었던 것은
왼쪽이었다
왼쪽
한번 붙들린 시선이 돌아오지 않는 방향
개장을 발칵 뒤집어놓고 작업장으로 끌려가던
백구에 눈빛도
왼쪽이었다 

 

훈련수료식

 

한 달 만에 인사를 기침으로 한다
막사가 묵은 탓이라는데
이틀 밤만 지나면 끝난다고
애기 송아지
나서 보는 소싸움판
불 꺼진 마른 여물에
옥수수 사료 한 바가지라 해도
온종일을 되새겨 먹었는데
인삼 장어탕에 개소주 한약
뼈마디마다 채워 넣고
비 흠뻑 내리는 이 밤이 걷히면
어떤 놈이고 한 놈은 넘어뜨려야 한다고
밤새 콧김 푹푹 품어대는 되새김질
어미 소 남 먼저
탯줄 삼킬 적엔
젖이나 먹일 요량이었지만
단단한 목심만 보고
모래판에 실려가고 나면
축사에는
밤 깊은 양철비

 

팬 사인회
- 황동규 시인

 

점 하나 흘리셨을 때
그 말씀은 ‘이것은 단풍입니다’
한쪽으로 길을 내 
그저 넘나들던 말소리 
정지선에 세워두고
들여놓는
숨소리 중에 숨소리

 

신용카드를 만들며

 

인천에서 부산으로
창원으로
일거리 찾아 두리번거리는 동안
척추 5번 6번이 엉켜버린 허리로
나서는 새벽 1시는
가을에도 겨울바람이 분다
아귀 틀어진 창문 
스산한데
한 장에 오만 원이면
감밭에 일품 나간
102호도 카드가 필요할지 몰라

 

육지 가는 배

 

아버지의 술은 어린 날 바다였다
그 바다에서
소녀를 데리고 나온 육지 배는
육지 같은 섬으로 소녀를 데리고 갔다
머리를 올리고
아이를 낳고
술과 도박과 폭력의 섬
속옷 든 가방만 들고 떠났다
숙식제공 식당이나
숙식제공 모텔 청소에 아이를 데리고 갈 자리가 없어서
섬에 아이를 두고
아버지니까
그 말을 부적처럼 묻어두고 
뱃머리 갈매기는 울었을까
그때 등대는 어디쯤 있었을까
선착장
바닷바람이 동서남북으로 흩어지는 선착장에
짐 부리듯 배 
떠나고 
비릿한
파도가 품고 온 것은
일용직으로 떠돌던 남자
현장에서 술병으로 죽고 상주된 딸이
늘 혼자였던 방에서 삭힌다는 울음소리였다
배를 기다린다
육지 가는 배도 아니고
섬으로 되돌아갈 배도 아니고
선불로 받아쓴 날들이
바다로 길을 나서는 배

 

신발가게

 

분리수거 봉투 100리터는
차에 실리다 말고 
속을 점검받고 있었다
반쯤 들어간 몸이 바닥을 살피는 동안
아버지의 눈빛이 쫓겨 간 자리가 건너편 3층 옥상 끝인지
옥상과 옥상 사이 하늘인지 
폐지 트럭 운전대
아픈 아들의 시선은 아버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 만에 툭 
비닐 바람 일으켜 놓고 장바구니는 제 갈 길로 갔지만 
트럭 안에서 트럭 밖에서
멀리 나간 마음은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정표

 

회성동 가로수 아래
서마산IC
비 묻은 바람은 은행잎마다 
가위 장단
2차선 사잇길을 자른다
중절모 바람을 타고
넝마주 그림자 골골이 
연지로 곤지로 새어나는
호박엿 깨엿 
차들이
제 나름의 모습으로 떠나는 이정표는
물물이 흘러가는 대합실인데
수년 동안
어디로 가겠다는 건지
IC 신호등 아래
길을 찾는 
가위 소리

 

절집에서

 

웃대 할메 공줄에 묶이어
사십에
마음은 때마다 달아난다
IMF
엎칠락 뒤치락거릴 때
용하다는 장군님은 자손 공들인 할메
제삿밥 바라신 탓이라는데
웅크려 앉은 골짜기 
젖은 구름
노스님 비워주신 행랑에 
버려도 남는 짐 보따리 풀면
범종 
떠밀려갔다 떠밀려오는 마음
부처님 허리춤에 끈을 묶고
천 배 만 배 접었다 펴는 대웅전

 

골절이라는 말은

 

혼자
주섬주섬 해 오던 살림에
밥이 있거나 없거나
때 삼아 풀던 소주병과
딸에게 기대인 삶에
반 맑고 반 흐린 요양병원
8인실에서 6개월쯤 지내다 보면
감계장 서는 날
고기 지져서
버릇대로 먹고 싶은 입맛이지만
나이 팔순에 
그것도 안사람 없는 골절이란 
몸에 배인 큰소리가 자리를 잃는 일
집도 저 혼자 늙어갈 것을 생각하는 일

 

박해숙 시인
박해숙 시인

◇ 시인 박해숙 
1969년 2월 2일 경남 의창군 북면 무동리 363번지에서 태어났다. 윤창, 윤환, 윤정의 엄마. 2008년 미용학원에 다니면서 방송대 국문과 강의를 들었다. 시를 향해 가는 천 리 밖 한걸음. 2009년 미용을 배우도록 도와주시던 아버지께서 떠나셨다. 상고머리 고쳐드릴 기회를 잃은 가을이었다. 2011년 1월 18일 북면에 미용실 영업 신고를 냈다. 2012년부터 경남대 평생교육원 시창작 반에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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