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창간호-특집 : 쇠의 바다, 경남 고성과 김해】 문학전통 - 김해의 문풍과 서원

장소시학 승인 2022.12.26 14:20 | 최종 수정 2022.12.27 12:52 의견 0

문학 전통

김해의 문풍과 서원

정 석 태 | 점필재연구소

 

1. 조선시대 김해의 문풍

김해는 가락국의 옛 수도로 신라에 통합된 이후에는 금관소경金官小京·김해소경金海小京 등으로 그 본래의 면모를 유지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김해부金海府·금녕도호부金寧都護府·금주목金州牧 등으로 변화하면서 큰 도회로 발전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413년(태종13)에 도호부都護府가 되고 1467년(세조12)에 진관鎭管이 설치되어 창원·함안·거제·칠원·진해·고성·웅천을 관할하는 경상우도 중부 낙동강과 남해안 연안의 전략요충도시로 발전하였다.

조선시대 김해는, 그 남동부 대산·생림·상동·대동·가락·명지 등은 낙동강과 남해의 연안에 위치해 있어서 강과 바다를 통한 교역과 물산획득이 용이하였으며, 그 북서부 한림·진영·진례·장유·주촌 등은 비음산·대종산·불모산·팔판산·화산·굴암산 등이 병풍처럼 펼쳐진 그 아래로 넓은 농경지를 형성하여 높은 소출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처럼 교역과 물산획득 및 농사 등 생활여건이 좋았기 때문에 바다를 통한 외침에서 안정되기 시작한 조선 초기 이후로는 여러 명문가들이 속속 터를 잡으면서 문화적으로 번영을 구가하였다.

조선시대 김해는 전래의 4대성인 창녕조씨昌寧曺氏, 광주노씨光州盧氏, 김해허씨金海許氏, 청주송씨淸州宋氏와 김해김씨金海金氏, 광주안씨廣州安氏, 의성김씨義城金氏, 재령이씨載寧李氏, 문화류씨文化柳氏 등이 강력한 재지기반을 갖춘 사족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중에서도 조선 초기에는 김해김씨 가문이 특히 두드러졌다. 김해김씨 가문은 조선 초기에 김조金銚(?∼1455), 서강西岡 김계금金係錦(1405∼1493), 퇴은退隱 김계희金係熙(1435∼?), 괴애乖崖 김극검金克儉 (1439∼1499) 등이 중앙에 출사하면서 크게 흥성하였다.

서강 김계금과 그 삼종제 퇴은 김계희는 김해 사족사회에 충절忠節과 퇴은退隱의 중요성을 깊이 각인시켰다. 서강 김계금은 1454년(단종2) 문과에 급제하고 그 이듬해 사육신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서 단종에 대한 충절과 의리를 지켰다. 세상에서는 생육신에 한 사람을 더할 만하다는 뜻으로 육일거사六一居士라고 일컬었다. 그의 호 서강西岡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薇蕨]를 캐어 먹다 굶어 죽은 백이숙제의 고사에서 온 것으로, 사후 묘소 주변에 전에는 자라지 않던 고사리가 자라기 시작하여 묘소가 있는 고개를 궐현蕨峴이라고 하고, 그를 제향한 서원을 미양서원薇陽書院이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퇴은 김계희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거쳐 한성부윤을 역임한 다음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김해 화포천花浦川 가에 정자를 짓고 한가롭게 지내는 고상한 풍도를 보였다. 세상에서는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 지내던 정자를 그의 첫 벼슬인 예문관검열의 이칭 한림翰林을 붙여 한림정翰林亭이라고 불렀고, 이로 말미암아 한림정이 위치한 지역을 한림면이라고 부른데서 김해 한림면의 이름이 유래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김해김씨 가문 출신으로 이 두 사람 외에도 김해 사족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과 그의 장조카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1479∼1551)이다. 탁영 김일손은 비록 그 선대에 이미 청도로 이주하였지만 여전히 김해에 재지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탁영 김일손을 통해 야은冶隱 길재吉再(1353∼1419),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으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학문과 사상이 일찍부터 김해에 전파되고 또 뿌리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김해의 문풍 형성 및 남명학파의 전개와 관련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은 삼족당 김대유이다. 그는 무오사화로 숙부 탁영 김일손이 화를 당하였을 때 부친과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 1519년(중종14) 현량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내다가 기묘사화로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직과 급제가 모두 삭탈된 뒤 청도 동창천東倉川 우연愚淵 가에 삼족당三足堂을 짓고 은거해서 지냈다. 그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자신들의 집단인 ‘산림의 학자學者’와 대척에 선 ‘산림의 고사高士’로 지칭한,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을 위시해서 경상도 강우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일군의 인물들, 후일 남명학파로 귀일된 일군의 인물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남명 조식과는 한 평생 망년의 벗으로 깊은 교류를 나누면서, 김해 산해정(山海亭)에서 지내던 중장년 시기 남명 조식의 사상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삼족당 김대유와 함께 중장년 시기 남명 조식의 사상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친 또 한 사람은 밀양 사포沙浦에 은거해 있던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1499∼1562)이다. 그는 한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오로지 학덕學德을 닦은 포의布衣의 처사였다. 남명 조식은 그의 묘갈명에서 자신을 위시한 산림처사들 중 최고이자 성인 공자孔子의 경지에 다가선 인물로 칭송하였다. 삼족당 김대유와 깊은 교류를 나누었고, 남명 조식이 일찍이 그를 스승으로 해서 학문을 닦았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남명 조식의 고제高弟 내암來菴 정인홍鄭仁弘(1535∼1623)과도 학문적으로 깊은 관련을 가진 사람이었다.

삼족당 김대유, 송계 신계성, 남명 조식, 내암 정인홍으로 이어지는 이 계열은 사승관계로까지 확대해서 말하기는 어렵더라도 상호 일정한 학문적 수수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당시 송계 신계성, 남명 조식과 함께 영중삼고嶺中三高로 일컬어진 합천 초계의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顏(1504∼1559)을 더하여 본다면, 후일 남명학파는 밀양강과 황강 등 경상도 강우지역의 낙동강 여러 지류 주변의 산림에 포진해 있던 일군의 인물들의 학문적 움직임이 김해 낙동강 가 멀리 남해를 전망하는 남명 조식에게로 귀일되면서 남명학파가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 삼족당 김대유, 송계 신계성, 남명 조식, 황강 이희안, 내암 정인홍과 학문적, 혈연적으로 깊이 연계된 가문은 남명 조식의 강학지인 김해만이 아니라 청도, 밀양, 양산, 합천, 함안, 창원, 창녕, 진주, 의령, 산청, 거창, 성주, 고령, 현풍 등 경상도 강우지역에 폭넓게 포진하고 있었다. 이것이 후일 남명 조식의 중장년 시기 강학지인 김해 산해정을 모체로 남명 조식과 송계 신계성을 병향하는 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창건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김해의 신산서원은 산청의 덕천서원 및 합천[삼가]의 용암서원과 함께 경상도 강우지역 남명학파 3대 본산의 하나로서, 1588년(선조21) 창건 이후 탁영 김일손을 통해 전해진 사림파의 투철한 의리사상과 남명 조식과 송계 신계성을 통해 전해진 산림처사의 실천궁행하는 도학정신을 지역사회에 전파하여 지역사회 문풍을 진작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사림파의 투철한 의리사상과 산림처사의 실천궁행하는 도학정신을 지역사회에 드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송담松潭 송빈宋賓(1542∼1592), 관천觀川 이대형李大亨(1543∼1592), 김득기金得器(1549∼1592), 낙서樂棲 류식柳湜(1552∼1592)의 사충신이 포의의 신분으로 목숨을 걸고 김해성을 지키다가 순사한 것도 이러한 의리사상과 도학정신의 현실적 구현일 것이다.

그리고 근대 김해 출신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1855∼1931)이 신산서원의 강학정신을 온전하게 계승해서 교육했던 밀양 노곡蘆谷의 자암서당紫巖書堂에서 배출한 남강南崗 조정환曺正煥(1875∼?), 거인居仁 류진옥柳震玉(1879∼1928), 법강法岡 안효진安孝珍(1879∼1946) 등 여러 인재들이 파리장서에 서명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한 것도 이러한 의리사상과 도학정신의 현실적 구현일 것이다.

또 소눌 노상직의 백형 대눌大訥 노상익盧相益(1849∼1941)이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해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것이나, 금주錦洲 허채許埰(1859∼1935)가 밀양 단장丹場에 주산서당珠山書堂을 세워 후진교육에 힘을 쏟았던 것도 이러한 의리사상과 도학정신의 현실적 구현일 것이다.

2. 조선시대 김해의 서원

조선은 건국과 함께 중앙에 성균관을 두고 지방 각 고을에 향교를 두어 학문과 교육이 중앙의 통제 하에 관학을 중심으로 행해질 수 있도록 법제화하였다. 이것은 한편으로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는 방편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새로 건국된 왕조의 수요에 부응할 관료를 양성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국시로 내건 성리학의 이념에 입각해서 볼 때, 왕조의 수요에 부응할 관료를 양성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될 수 없었던 것이 엄연한 현실이었다. 성현이 되기 위한 공부를 하는 것, 요사이 말로 하자면 입시교육이 아닌 참교육을 행하여 참된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 교육의 목표였던 것이다.

따라서 초기의 4대 사화를 거치며 성리학의 이념이 사회전반에 뿌리를 내리게 되자, 선비들은 관료양성을 목표로 하는 관학으로서 성균관과 향교를 점차 외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벼슬길에서 물러나 전국 각지에 은거해서 강학을 하던 학덕 높은 선생의 정사나 서당으로 찾아들게 되었다. 말하자면 학문과 교육의 중심이 관학官學에서 사학私學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경상도 예안에 은거해서 강학하던 퇴계 이황의 도산서당으로 학문에 뜻을 둔 선비들이 몰려든 것이나, 같은 경상도 김해·합천·산청 등지에 은거해서 강학하던 남명 조식의 산해정·뇌룡정·산천재로 학문에 뜻을 둔 선비들이 몰려든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1500년대 후반부터 가속화된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전국 각 고을의 서원창건은 이와 같은 역사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신산서원은 남명 조식의 중장년 강학지인 김해의 산해정을 모체로 산림처사로서 실천궁행하는 그의 도학정신을 구현할 터전으로 창건되었다. 1588년(선조21)에 김해부사 양사준楊士俊(1521∼?)과 안희安憙(1551∼1613) 등 김해사림이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탄통炭洞 산해정 동쪽 신어산神魚山 기슭에 창건하여 남명 조식을 제향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신산서원과 산해정이 모두 소실되자, 1609년(광해군1)에 김해부사 김진선金振先과 안희安憙·황세열黃世烈 ·박수춘朴壽春(1572∼1652)·허경윤許景胤(1573∼1646)·배홍우裵弘祐(1580∼1627) 등 지역사림이 산해정 옛터에다 중건하고, 같은 해 남명 조식의 만년 강학지 두 곳에 창건한 덕천서원[산청의 산천재] 및 용암서원[합천 삼가의 뇌룡정]과 함께 사액을 받아, 명실상부하게 경상도 강우지역 남명학파의 3대 본산의 하나가 되었다. 1616년(광해군8)에는 송계 신계성을 함께 제향하였다.

신산서원은 삼족당 김대유, 송계 신계성, 남명 조식, 내암 정인홍으로 이어지는 산림처사계열의 학문적, 혈연적 기반을 토대로 해서 창건되었음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 특히 초기에 내암 정인홍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설립과 중건이 추진되고 또 사액이 이루어지면서 남명 조식이 사문師門의 종지를 내암 정인홍에게 전수했다고 일컬어지는 「대학팔조가大學八條歌」[「격치성정가格致誠正歌」]를 남명 조식의 학문지결로 높이 받들 정도로 내암 정인홍의 영향력이 지대한 서원이었다. 그리고 1610년(광해군2) 남명 조식의 위패를 봉안하고 1616년(광해군8) 송계 신계성의 위패를 봉안하게 되면서 서원에 적을 둔 유생만 70여 명에 이르고, 그 거주 지역은 김해만이 아니라 청도, 밀양, 양산, 합천, 함안, 창원, 창녕, 진주, 의령, 산청, 거창, 성주, 고령, 현풍 등 경상도 강우지역에 두루 걸치는 큰 서원으로 발전하였다.

신산서원은 현재 그 초기의 모습을 가급적 온전하게 살펴볼 수 있는 학규인 「신산서원입규新山書院立規」가 남아 있다. 이것은 1620년대 초반 원장을 지냈던 매죽헌梅竹軒 이명호李明怘(1565∼1624)가 작성한 것이다. 그는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의 「은병정사학규隱屏精舍學規」를 참고하여, 원장·유사·유생 등 서원의 인적구성과 그 역할, 서원의 입학 자격과 절차, 서원의 교육 목표와 내용, 서원의 의식과 절차, 서원 내외의 생활과 상벌규정 등 서원 관련 모든 내용 하나하나를 전부 규정해서 학규를 작성하였다. 무엇보다 서원이 과거공부가 아닌 성현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학문을 익히는 공간임을 분명히 함과 동시에, 그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서원생활에서 서원 유생 개개의 행동 하나하나를 엄격하게 규율하는, 말 그대로 쇄소응대灑掃應對의 하학下學에서부터 성현으로 상달上達하려고 한 남명 조식의 뜻이 잘 관철되어 있는 학규를 제시한 것이다. 나아가 그러한 목표를, 서원을 중심으로 하나의 학문결사체를 형성한 집단의 자율적인 행사를 통해 실현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짜 놓고 있다. 서원이 과거공부를 위한 교육기관이나 지역여론조성 등을 통한 정치권력의 행사기관이 아닌, 성현이 되는 것을 목표로 공부하는 순수한 학문결사체라는 서원설립의 본래 취지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남명 조식이 산림에 은거했던 본래의 뜻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학규를 제정한 당자인 내암 정인홍과 그 제자들이 북인北人으로 정치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면서, 이 학규의 취지를 현실에서 제대로 실현해 보지 못한 채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1623년(인조1) 인조반정으로 북인정권이 무너지고 내암 정인홍이 사사되면서, 경상도 강우지역에 폭넓게 분포했던 내암 정인홍 제자 가문을 포함한 내암 정인홍과 학문적, 혈연적으로 연계된 가문들이 쇠락하거나 내암 정인홍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가게 되자 그 경제적 기반이 축소되고, 나아가 학문적 기반도 함께 축소되고 말았다. 주어진 현실에 맞추어, 창건 초기 중앙정계와 연계된 전국적인 영향력을 가진 사액서원에서 김해의 한 서원으로 그 위상을 조정하게 되었다.

그 이후 신산서원의 운영주체가 된 창녕조씨·청주송씨·김해허씨·광주노씨·김해김씨·광주안씨·의성김씨·재령이씨·함안조씨·현풍곽씨·진주강씨 등 김해의 유력 사족가문들이 자신들의 경제기반과 인적기반을 토대로 향사와 강학을 행하는 한편, 그 가문들의 학문적 경향에 따라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1627∼1704)에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1∼1781)으로 이어지는 영남 퇴계학파의 서원, 남명 조식의 정신과 퇴계 이황의 학문을 결합한 서원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1866년(고종3)에는 김해부사이자 근기남인의 종장 성재性齋 허전許傳(1797∼1886)이 원장을 맡으면서 영남 퇴계학파의 학문과 근기남인의 학문을 결합한 서원, 나아가 근기남인의 비조인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로 거슬러 올라가 퇴계학파의 이론적 학풍과 남명학파의 실천적 지향이 조화롭게 통합된 서원으로 새롭게 발전할 기회를 갖게 되었지만, 뒤이은 훼철로 신산서원을 통한 강학이 더 이상 어렵게 되고 말았다.

1871년(고종8) 서원철폐령으로 신산서원이 훼철된 뒤에도 김해의 선비들은 여전히 남명 조식이 사문의 종지를 내암 정인홍에게 전수했다고 하는 「대학팔조가」[「격치성정가」]를 남명 조식의 학문지결로 가슴 깊이 기억하고 그 정신을 되살려갈 길을 도모하였다. 이 사실은 1890년(고종37) 만취晩翠 노수용盧壽容(1833∼1902)이 김해지역 선비 조영환曺泳煥·하경도河慶圖·허찬許燦 등과 함께 산해정을 중수해서 남명 조식을 향사하게 되었을 때, 월삭(月朔)의 강회를 열면서 먼저 서원의 유생들로 하여금 「대학팔조가」[「격치성정가」]를 외우게 했던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남명 조식의 뜻을 잘 반영해서, 성현이 되는 것을 목표로 공부하는 선비들의 자율적인 학문결사체로 창건하고 또 그에 맞게 학규를 제정했던 신산서원의 정신도 김해 출신 선비들에게 깊이 기억되었다. 그것은 비록 서원의 훼철로 신산서원에서는 실현하지 못했지만, 후일 김해 출신이자 성재 허전의 적전인 소눌 노상직의 자암서당에서 온전하게 실현되었다.

김해에는 신산서원 외에도 조선시대에 창건된 서원으로 미양서원薇陽書院, 송담서원松潭書院, 구천서원龜川書院, 물봉서원勿峯書院, 예암서원禮巖書院 등이 더 있다.

미양서원은 1832년(순조32) 서강西岡 김계금金係錦(1405∼1493)을 향사하는 서원으로 창건되었다가 1868년(고종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고 1990년 복원되었다. 송담서원은 1784년(정조8) 임진왜란 때 김해성을 사수하다 순절한 송담松潭 송빈宋賓(1542∼1592), 관천觀川 이대형李大亨(1543∼1592), 김득기金得器(1549∼1592)를 향사하는 서원으로 창건되었다가 1868년(고종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고 1995년 복원되었다. 1871년(고종8) 김해부사 정현석鄭顯奭이 사충단四忠壇을 세워 낙서樂棲 류식柳湜(1552∼1592)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구천서원은 1822년(순조22) 죽암竹菴 허경윤許景胤(1573∼1646)을 향사하는 서원으로 창건되었다가 1871년(고종8)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고 1995년 복원되었다. 물봉서원은 1814년(순조14) 정옹酊翁 조구령曺九齡(1657∼1719)을 향사하는 서원으로 창건되었다가 1868년(고종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고 현재 복원을 준비 중이다. 예암서원은 1709년(숙종35) 사우당四友堂 조이추曺爾樞(1661∼1707)를 향사하는 서원으로 창건되었다가 1869년(고종6)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고 2005년 복원되었다.

신산서원 외에 이 다섯 개 서원에 제향된 서강 김계금, 송담 송빈, 관천 이대형, 김득기, 죽암 허경윤, 정옹 조구령, 사우당 조이추의 일곱 분을 김해의 향사칠현鄕社七賢이라고 한다. 향사칠현이란 남명 조식 외에 김해의 문풍 형성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여 김해의 서원에 제향된 분들을 높여 일컫는 말이다. 극재齋 노필연盧佖淵(1827∼1885)이 「김해향사칠현열전金海鄕社七賢列傳」을 지어서 그 행적을 널리 선양하였다. 서강 김계금은 탁영 김일손 및 남명 조식 이전에 김해에 충절과 퇴은의 중요성을 깊이 각인시켰던 분이며, 송빈·이대형·김득기는 사림파의 의리정신과 산림처사의 도학정신을 전란의 현장에서 몸소 구현했던 분들이며, 허경윤·조구령·조이추는 신산서원의 중건과 수호에 헌신했던 분들이다.

3. 근대 김해의 서당교육과 서원의 설립

근대 김해지역에는 서당설립과 그와 관련한 유계회儒契會, 學契의 결성이 성행하였다. 이것은 모두 성재 허전이 김해부사로 부임한 이후에 행했던 강학활동과 그를 통해 지역의 문풍을 진작시킨 것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성재 허전은 1866년(고종3) 김해부사로 부임해서 양사재養士齋, 就正齋를 활성화하고 공여당公餘堂을 개방해서 강학을 하게 되자, 김해만이 아니라 경상도 여러 지역의 선비들이 그 문하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리고 성재 허전이 김해부사를 그만두고 떠난 뒤에도 극재 노필연 등 김해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취정계就正契를 조직하고, 그 이후에는 또 취정보유계就正補遺契를 결성해서 그 학문을 계승해 가려고 하였다. 이것이 신산서원의 학문전통을 이어서 또 다른 김해의 학문전통이 되면서 김해지역에는 근대 이후, 특히 일제강점기에 서당의 설립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유계회의 결성이 몹시 성행하였다.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소눌 노상직의 자암서당 강학과 금주 허채의 주산서당 강학이 가장 돋보인다. 신산서원 창건 이후 김해지역에 맥맥히 계승되어 오던 신산서원의 강학정신과 한말에 그것을 되살려낸 성재 허전의 강학정신을 근대 망국의 위기상황에 현실에서 구현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암서당과 주산서당은 모두 김해가 아닌 밀양[단장]에 위치해 있었지만 그것이 신산서원 강학정신과 그것을 되살려낸 성재 허전의 계승이 아닐 수 없다. 이 두 서당은 모두 일반적인 대도회가 아닌 서원처럼 학자가 세속을 멀리한 채 조용하게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그래서 스승과 제자가 하나의 학문공동체로서 서당마을을 이루어 강학을 해 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적지로 밀양[단장]을 택한 것이었다. 이곳으로 다수의 김해선비들이 찾아와서 학문을 익혔다. 그리고 스승과 제자가 하나의 학문공동체로서 서당마을을 이루어 강학을 하였기 때문에 서당에 소속된 학생들이 제자들이 유계회를 조직하고 그 유계회의 계금契金을 조성해서 유지해 나갔다. 서당의 건물을 짓는 것에서부터 그 서당을 유지 보수하는 것에 이르기까지의 모두를 그 서당에 소속된 구성원으로 조직된 유계회와 그곳에서 거둬들인 계회의 계금으로 스승과 학생이 공동으로 운영하였다.

소눌 노상직은 1910년 망국 이후 갈헌葛軒 한동유韓東愈(1885∼1961)에게 답한 한 편지에서 “우리들은 운명이 박복하여 우리의 옛 나라를 지키지 못하였으므로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학문을 해도 학문이 될 수 없습니다. 이미 죽을 자리를 얻지 못하였으니, 오히려 마땅히 우리 선왕께서 교육으로 자강을 꾀한 방책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라고 한 것으로, 그가 서당교육에 전념했던 뜻을 읽어볼 수 있다. 그가 현실과 자신을 단절한 채 서당교육에 전념한 것은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1842∼1915)이 망국 이후 유자의 현실대처방식으로 제시한 처변삼사處變三事 중 ‘세상을 멀리 떠나 자신의 옛 것을 지킨[去之守舊]’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암서당 일지인 자암일록紫巖日錄을 기록하는 제자들에게 일지에는 절대 서당 밖의 세상사, 특히 시국의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기록하지 말 것을 엄히 명하였다. 그리고 자암서당으로 건너오는 다리를 ‘단진교斷塵橋’, 자암서당으로 올라오는 입구에 있는 시내를 ‘세심간洗心澗’으로 명명하면서 세속과 완전 절연된 세계 속에서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는 공동체를 지향하였지만, 그곳에서 길러낸 인재들 다수가 파리장서에 서명하고, 또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사들도 많이 나오게 되었다.

김해의 서원으로는 조선시대에 창건된 신산서원·미양서원·송담서원·구천서원·물봉서원·예암서원 외에 현대에 창건된 월봉서원月峯書院을 더 들어볼 수 있다. 월봉서원은 월헌月軒 이보림李普林 (1903∼1972)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1986년 지역유림이 김해시 장유3동 덕정마을 월봉서당月峯書堂 안에 명휘사明輝祠를 건립해서 위패를 봉안하고, 월봉서당을 월봉서원으로 고쳐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월헌 이보림은 조선 중종의 제5남 덕양군德陽君 이기李岐(1524∼1581)의 후손이다. 선대는 경기도 여주에서 살다가, 7대조 소요재逍遙齋 이춘흥李春興(1684∼1766)이 신임사화辛壬士禍를 계기로 밀양[삼랑진 율동]을 거쳐 김해로 낙남落南해 살게 되면서 김해사람이 되었다.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와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1868∼1944)의 문인이다. 집안이 비록 낙남해서 경상도 김해에 터를 잡고 살았지만, 여전히 기호학파의 여러 집안들과 혈연적으로나 학문적으로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간재 전우, 그리고 간재 전우 사후에는 그 문인 석농 오진영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익히게 된 것이다. 일생 동안 담화종지潭華宗旨, 곧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석담石潭의 ‘담潭’]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화양동華陽洞와 ‘화華’]에서부터 유래한 학문의 종지를 굳건히 지키는 것으로 일관하였다. 학문은 율곡 이이를 종주로 하고 의리는 우암 송시열을 종주로 해서, 두 사람과 달리하는 어떠한 주장도 사설邪說로 간주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특히 당시의 시대상황과 관련해서 춘추의리에 의거한 척사위정[尊華攘夷]의 정신으로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전래의 의관과 두발을 고수하면서 왜색으로 흐르는 현실을 극력 비판하였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강화되면서 단발령이 새로 내려지고, 호적을 새로 고치고 묘지의 지적까지 등재하게 하는 등 압제가 더욱 가속화되면서 모두들 여기에 굴하고 말자, 우리가 오늘날 구차하게 살고 있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니, 오직 ‘수사선도守死善道’ 네 글자 부적을 이마에 붙여두어야 하겠다.”라고 하고는, 봉산재서당鳳山齋書堂과 일신재서당日新齋書堂을 열어 원근의 선비들을 모아 전통한학을 가르쳤는데, 집이 좁아서 모두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는 전통윤리를 부식하고 후진을 교육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72년 월헌 이보림의 사후에는 그 자제 화재華齋 이우섭李雨燮 (1931∼2007)에 의해 서당이 계속 유지되었다. 그리고 서당을 유지하던 학계가 존속되면서, 1983년에는 마침내 그 서당과 학계를 모체로 명휘사를 세우고 월봉서원을 창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김해에 월봉서원이 창건된 것은 비록 현대의 일이기는 하지만,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의 학문만이 존재했던 김해에 기호학파의 학문을 보태어 전통한학의 다양화를 기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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