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창간호-특집 : 쇠의 바다, 경남 고성과 김해】 답사기 - 소낙비 갠 날 최계락 시인의 꽃씨 머문 자리

장소시학 승인 2022.12.31 05:02 | 최종 수정 2022.12.31 05:33 의견 0

답사기

소낙비 갠 날 최계락 시인의 꽃씨 머문 자리

김 영 화 | 시인

 

1. 시인을 찾아가다

시월 막바지 시인을 만나러 간다. 옥계 휴게소를 지나 도로 공사가 한참이다. 우회도로를 내고 또 내어도 길은 자꾸 차량에 먹힌다. 풍경은 끊어지고 낯선 건물들이 눈길을 가로막는다. 배둔에 이르기 전 오른쪽 갈림길 금곡 구만 방향이 개천면과 이어진다.

초입부터 크고 작은 목장, 축사들이 도로 양쪽에 자리 잡고 있다. 바다를 낀 고성을 짐작하기 어렵다. 구만면 사무소 지나면 이정수 애국지사 묘 표지판이 들어온다. 공룡알이라고 재미있게 불리는 볏짚 곤포 덩어리가 드문드문 보인다. 곧 너른 들은 덩치 큰 알을 뚝뚝 쟁일 것이다. 주변 목장 가축들은 이 발효 목초로 한겨울을 나지 않을까.

최낙종 지사 생가가 있는 옥산재를 지나면 느닷없이 대숲 가로수가 나타나고 ‘독립만세 국천로’다. 고성 지역이 나라잃은시대 만세 봉기로 애국지사를 배출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자칫 잊고 지나칠 소중한 흔적을 도로 이름으로 남김으로써 되새길 일이다.

계단식 논이 제법 넓게 펼쳐진다. 조선 후기 사대부 전통가옥 형태인 청광리 ‘박진사 고가’ 건너 산봉우리가 뾰족하다. 그 아래 ‘축산분뇨 자원화 시설’까지 갖춘 젖소 농장들이 이곳 생업을 짐작할 수 있다.

개천면은 애호박 재배지로 유명세를 타고 밤이 주 소득 작물이다. 비닐하우스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낙농업이 더 앞선 것 같다. 젖소 목장 사이 드물게 한우 농장도 보인다. 누렁소와 눈이 마주쳤다. 꿈뻑 순한 눈이다. 농장을 낀 집 담벼락 꽃분홍 맨드라미가 환하다. 닭벼슬 같은 자줏빛이 아니라 모양도 빛깔도 개량이 미덕이다.

이윽고 가천마을이다. 시인이 잠든 묘소가 있다. 개천면은 1906년 진주군에서 고성군으로 편입되었다. 그래서인지 국도에서 시인을 찾아오는 길 안내가 진주 방향을 가리켰었다. 짧은 거리로 안내 했었지만 고성 방향으로 틀었다. 가천마을 표지석 채 미치지 못한 사잇길을 들어서자 마을 경로당이 마주한다. 경로당 마당은 작은 게이트볼장이 있다. 빈 마당 옆 옹기종기 유모차 네댓 임자를 기다리고 있다.

묘소로 향하는 초입은 크기가 제각각인 돌담이 모퉁이를 돈다. 긴 장마에도 집집마다 감들이 실하다. 땡감 대봉감 할 것 없이 넉넉하다. 수분이 마르기 전에 거둬야 할 텐데 손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빈집도 더러 보인다. 기운 처마 밑 흙담은 제 몸을 버티지 못하고 들뜨고 이지러졌다. 절로 자랐는지 이웃 손길인지 호박이 길까지 엉덩이를 내밀었다. 노란 호박꽃이 연신 어린 멍울을 품고 있다. 가천4길 우편함에 땅, 집 전화 달라는 부동산과 마트 전단지가 어지럽게 꽂혔다. 도시 은퇴자들이 고성 지역에 노후 터를 마련한다는 소문이 떠올랐다. 누군가는 떠나고 번잡을 버리고 들앉는 이도 있다. 돌담을 파고든 담쟁이덩굴 손 악착같이 뻗어 단풍이 곱다. 농산물 저장 창고 앞 벼가 마르고 있다. 벼 말리는 광경도 귀한 요즘 종자라도 할 모양이다.

언덕을 살짝 오르자 억새가 눈부시다. 가천저수지다. 크지 않은 못인데 붕어 낚시도 한다니 참 옹골지다. 산 아래까지 이어진 논들을 길러 먹였을 것이다. 추수를 기다리는 벼들이 영글고 있다. 황금빛이 곱다. 눈 두는 곳마다 색깔에 사로잡힌다.

일러준 대로 저수지 지나 50미터 정도 바라보이는 곳에 녹색 철 울타리가 보인다. 바로 시인이 잠든 선영이다. 발걸음을 빨리한다. 성급한 농부가 심은 마늘이 쫑긋 싹을 틔우고 있다. 수확하고 남은 풋고추가 시들시들하다. 밭은 비거나 곧 다른 작물에 몸을 내어 줄 것이다. 선영 둘레는 완만한 곡선을 이룬 산들이 답답하지 않게 물러서 있다.

철문은 굳게 닫혀 있다. 묘역이 산에 인접해 있어 멧돼지 헤집는 것을 막으려는 것 같다. 그렇더라도 시인의 묘소를 찾는 사람으로선 조심스럽다. 더구나 전주 최씨 가족 묘지다.

입구에 둥치 굵은 벚나무가 수령이 깊어 보인다. 봄날 찾으면 환한 얼굴로 먼저 반기리라. 울타리 바깥 왼쪽에는 해송 아홉 그루가 감싸 돌아 있다. 울타리 너머 시비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 웃자란 주목 두 그루 사이 양면 시비다. 바깥을 바라보는 시는 「애가哀歌」다. ‘어느 석탑에 부쳐서’라는 부제가 붙었다. 마치 자신을 노래한 듯하다. 선영 안쪽으로는 「외갓길」을 새겼다. 바로 말하면 「외갓길 1」이다. 간결한 시어로 그림책을 보듯 선명한 색채 동시다.

 

애가(哀歌)
- 어느 석탑에 부쳐서

아득히
돌아선
하늘이었다

산과 들이며
나무도 풀도

어쩌면
꿈결처럼
홀로서 가고

휘저어도
휘저어도
하염없는 것

설움이사 차라리
이끼에 묻고

머언 그날에도
가랑비사 왔거니

말없이 말없이
맞고 섰노라

 

외갓길 1

복사꽃 발갛게
피고 있는 길

파아라니 오랑캐가
피여 있는 길

엄마한테 손목 잡혀
나서 첨으로

하늘하늘 아가의
외갓집 가는 길은

나비가 앞장서는
붉은 언덕길

바람이 앞장서는
붉은 언덕길

바람이 앞장서는
파아란 들길

 

치자나무, 향나무, 영산홍이 묘역을 빙 둘러싸고 시비 옆은 백일홍이 마지막 꽃잎을 달고 있다. 시인의 무덤은 가운데 제단을 중심으로 오른쪽 위 셋째 단 가장자리에서 두 번째다. 봉분이 아닌 오석으로 만든 평장 형식이다. 시인의 묘소는 부산 금정구 부산 시립공원묘지에 있었다. 아마 부인 구정희 여사 사망 후 가족 선영에 같이 모신 것 같다. 동갑내기 내외가 48년여 헤어졌다 서로 알아보기나 했을까. 애잔하다.

2. 짧은 삶과 깊은 문학활동

최계락은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이다. 1930년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 597번지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두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었다. 아버지가 진주를 오가며 사업을 하다 어려워지자 중학교 때 파성 설창수 댁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진주중 2학년 때 이미 「고갯길」이라는 동요를 발표했고, 중 3때 경남일보 신춘 창작모집에 시 「겨울」이 가작으로 당선되었다. 17세에 『소학생』지에 동시 「수양버들」이, 『어린이나라』·『소년세계』로 아동문학, 1952년 『문장』에 「애가哀歌」가 추천되어 시와 동시 작품 활동을 함께 했다. 시인은 진주를 제2의 고향이라고 후일 밝힌다. 1954년 부산에서 경남일보 문화부장을 지냈고, 1956년부터 국제신문에 근무하는 등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정이 많아 주변 사람들을 곧잘 챙겼고 그런 됨됨이는 친구나 후배들의 줄글에서 알 수 있다. 1957년부터 시작한 번역은 『대위의 딸』, 『알프스의 소녀』, 『베니스의 상인』 등이 있다. 1958년 해동문화사에서 『어린이 세계문학』을 번역하며 이주홍을 회장으로 하는 ‘부산아동문학회’에서 활동했다.

1959년 동시집 『꽃씨』를 통해 동심을 서정적으로 노래하고, 1966년 『철뚝길의 들꽃』을 통해 동시가 어린이 시선을 벗어나 시인의 눈으로 대상를 바라보는 문학성을 갖추게 된다. 이 두 시집은 시인의 생전 동시집이다. 이후 유고 시집 『꽃씨』와 『꼬까신』이 간행되었다. 1963년 부산시 문화상을 수상한다. 시인은 신문에 아동 문학가들 작품 발표 기회를 만들어 주는 등 지역 문화 발전에 힘쓰며 자신 또한 작품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시인은 간결한 시어를 구사함으로써 절제와 균형의 형식을 고집했다. 작품에 있어 스스로 엄격했던 것이다. 최계락은 1970년 7월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마흔이었다.

 

3. 시인을 기리다

최계락의 생가터는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 숲안마을이다. 생가를 찾은 날 지수면에 문의하니 이전에 있었으나 남해고속도로가 통과하며 없어졌다 한다. 다만 마을 초입에 생가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고 알려줬다. 남해고속도로 진주 방향 지수에서 내려 지수면사무소로 꺾기 직전 왼쪽 의령·함안과 오른쪽 사봉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 아래 ‘최계락 생가터 숲안마을’이라 새긴 3단 화강암 비다.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지만 면사무소 앞은 대기업 창업자 생가터 안내도가 크게 자리하고 있다. 세상인심이 부자에게 쏠리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어릴 적 흥얼거리던 노랫말이 떠올라 서글퍼졌다.

그러나 시인을 기리는 시비는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 부산 동래구 금강공원 「꽃씨」, 서구 대신공원 「해변」, 중구 용두산공원 「외갓길」, 남구 이기대 공원 「봄이 오는 길」이 있다. 그리고 진주시민녹지공원 「해 저문 남강」, 고성 남산공원 「꼬까신」이 건립되어 시민들 가슴을 덥히고 있다. 시인이 잠든 선영에 있는 시비는 시인 탄생 80주년이던 2010년 9월 ‘최계락문학상’ 재단에서 건립했다. ‘최계락문학상’은 2001년 동생 최종락이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기금을 출연했고 현재 국제신문사와 최계락문학상재단이 제정한 문학상이다. 2020년 20회째 수상자를 내고 있다.

시인의 묘소를 내려오니 마을 경로당 노인들이 정자 앞 느티나무 그늘에 나와 있다. 낯선 이가 궁금할 터이다. 먼저 이곳에 전주 최씨가 사는지 여쭈었다. 모두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가천마을에 선영을 마련한 것은 땅 구매에 따른 결정 이상은 아닌 것 같았다. 벼 걷은 빈 논에 고양이 세 마리 늦가을 햇볕을 나른하게 즐기고 있다. 고성은 비록 시인이 나고 자란 곳은 아니지만 뿌리가 있어 이곳에 잠들었다. 고성은 시인을 온전히 품었다. 여행길에 시인의 묘소를 찾아 그의 시를 떠올려 보기를 바라본다. 무엇보다 최계락 시인이 이곳 가천마을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 나도 모르게 「꼬까신」 동요가 흥얼흥얼 나왔다.

 

개나리 노오란
꽃그늘 아래 가즈런히 놓여 있는
꼬까신 하나
아가는 사알짝
신 벗어 놓고 맨발로 한들한들
나들이 갔나
가즈런히 기다리는
꼬까신 하나*

 

<주>
*최계락, 『최계락 동시선집』(이준관 엮음),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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