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창간호-특집 : 쇠의 바다, 경남 김해와 고성】 답사기 - 아나키스트 최낙종 열사의 생가를 찾아서

하순이 시인

장소시학 승인 2022.12.28 12:07 | 최종 수정 2022.12.29 09:10 의견 0

1. 고성 광복항쟁과 구만면

돌림병 공포도 계절 흐름은 막지 못했다. 굳고 단단한 성固城에 가는 날은 하늘이 맑고 푸르게 앉았다. 100년을 거슬러 기억해야 할 역사 속 인물을 만나러 가는 길, 설레었다. 밤밭고개를 오른 자동차는 내리막길을 지나자 숨을 토해 내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통영으로 가는 14번 국도는 확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길은 차들을 당겼다 세웠다를 반복했다. 배둔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구만면으로 들어서자 걷이가 준비된 벼들은 누런 고개를 바람에 흔들고 있다. 샛길로 들어서야 할 즈음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옥산재玉山齋, 어느 집안의 재실이라면 소박하게 집안 사람들을 맞을 텐데 마을 입구에 표지석 세울 만큼 세도가인가 궁금증이 일었다. 마을 초입에서 손전화로 최연도(최낙종 지사의 손자) 선생께 위치를 여쭙자 손수 운전하셔서 일행을 맞으러 오셨다. 고성은 전주 최씨 집성촌이 있는 곳이란다. 여름에 들렀던 학림마을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성군에서도 특별한 풍수를 지녀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된 곳이 구만면九萬面이다. 높은 산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어 굴 안 같다고 하여 갑오억변 이후 개칭 한 지명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했던 최강(경상수사), 최균(곽재우 참모 김덕령 장군의 부관)이 나왔고 나라잃은시대에는 최낙종, 최정원, 허재기가 광복항쟁을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최낙종 애국지사 생가 입구에서(고성군 구만면 당산길 67)
최낙종 애국지사 생가 입구에서(고성군 구만면 당산길 67)

배롱나무가 핀 논길을 따라 들어가자 집 입구에는 광복지사 후손답게 태극기가 게양돼 있고 감나무는 주홍빛 감을 매달고 서 있었다. 최씨 문중 당산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잡은 생가는 가을볕이 머물고 있었다. 당시 기와집이었던 곳을 허물고 새로 지은 집이라고 설명하셨다. 기미만세의거를 결의한 사랑채는 헐려 있고 집 뒤편은 면사무소였다는데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어느 쪽을 둘러보아도 산이 눈에 들어오고 소리치면 주위 마을에서 내다 볼 듯 아늑한 마을이었다. 당산을 둘러보려고 마을을 돌자 소들은 이표를 달고 눈을 껌뻑이며 오수를 즐기고 이방인을 본 진돗개는 확성기를 튼 듯 짖어댔다. 이렇게 평화로운 마을이 역사의 소용돌이를 그대로 받아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최낙종은 고성에서 한학을 공부하던 학자였다. 비애왕(고종) 인산에 참여 차 서울에 갔다가 1919년 기미 만세의거를 보게 된다. 하향하는 길로 고성에서 인접한 면과 사전에 연락하여 ‘독립선언서’를 필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3월 20일 구만면九萬面의 국천鞠川 모래사장에서 900여 명의 농민과 함께 봉기하여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활약하였다. 손자 최연도 선생은 “하천이 S자 모양으로 흐르면서 안쪽에 모래가 쌓이는 국천 모래사장은 면적이 넓어 집결 장소로 제격이었다”며 “시위 결의는 면사무소와 가까운 할아버지 생가에서 이뤄졌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3월 21일 「한인관리 퇴직권고문」을 구만면사무소에 첨부하고 다음날 이 권고문을 전국 각 도·군의 관공서에 발송하였다. 왜로가 사후 조사한 결과 고성군 기미만세의거 주동자가 최낙종임을 알고 체포하려 하였다. 서울로 잠시 몸을 숨겼고 함흥에서 언론인으로 활약하다 일본으로 건너간 인물이다.

언론에 조명된 최낙종 지사와 생가 거실에 걸린 훈장
언론에 조명된 최낙종 지사와 생가 거실에 걸린 훈장

안내한 거실로 들어가자 한학을 공부하던 선비 시절의 초상화와 잘 정돈된 곱슬머리, 차려입은 양복차림의 최낙종 지사가 건국훈장 속에서 옅은 웃음으로 집을 내려다보고 계셨다. 한 눈에 보기에 훈남이다. 소장하고 계신 자료들을 보여 주셨다. 어려서 일이라 조부님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자랑스러움은 커보였다. 나라의 빛을 찾기 위한 과정이 고달팠기에 가장으로서 역할은 소홀해서 남은 가족의 고생은 짐작이 쉬웠다. 지금의 차관급에 해당하는 예우를 국가로부터 받는 것이 다행이라 여겨졌다. 백 년을 거슬러 한 인물과 마주한 시간들이 짧고 제대로 된 기록이나 기억이 없어 안타까웠지만 후손들의 몫이라 생각했다. 짧은 만남을 오랜 기억으로 글로 표현해야 한다는 부담이 다가왔다. 연구자들이 책임감을 가질 때 제대로 인정받는 기회가 올 것이라 바래보면서 자료들을 건네받았다.

생가 뒤편 멀리는 그의 조상이 잠들어 있는 소나무들이 낙락장송의 기세로 당산마을을 지키는 듯했다. 최연도 선생은 구만면 국천변과 고성 기미만세의거 발생지와 회화면에 세워져 있는 유적비도 친히 안내해 주셨다. 짧은 한자 실력이 유감이라 사진 찍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순신 장군이 당항포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신 곳은 볼거리와 놀거리를 갖추고 정비되어 있었다. 왜적들이 속았다는 의미에서 일명 ‘속시개’라고 설명하셨다. 1억 5천 만 년 전의 공룡은 바닷가 곳곳에 발자국을 찍어놓고 모형으로 걸어 나와 있었다.

2. 왜국에서 활동과 삼문인쇄소

최낙종은 고성 최초의 광복항쟁 이끌었고 우리가 아는 대단한 광복투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이다. 후세들은 그를 잘 모른다. 그의 일본에서 활약상은 아직도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지금까지 행적은 성공적인 만세의거를 치르고 적의 심장부 도쿄로 간너가서 지식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찰에 쫓기는 처지에도 적국의 심장부로 발을 내딛는 결단성은 그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그동안 왜국 내에서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에 관한 연구는 왜로 국왕의 폭살을 준비하다 발각되어 23년간 옥고를 치른 박열 의열 투쟁과 일부 노동단체에만 주목해왔다. 그 밖 아나키스트 활동은 신간회나 공산주의, 사회주의 진영으로 나누어 단편적 개괄적으로 소개되었을 뿐이다.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우리가 국권을 상실한 100년 전부터 새로운 선진 사상으로 범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여 1920년대에 본격적으로 아나키즘을 광복이념이자 신사회건설 이념으로 수용했다.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나 공산주의자와는 달리 일체의 타협 없이 왜로군국주의에 맞서 총칼과 폭탄을 들고 가장 강력하게 투쟁한 혁명가들이었다.

특히 나라잃은시대 선진 문물을 배우거나 먹고살기 위해 왜국으로 건너간 한인 유학생들과 노동자들 중 자유 평등의 공동체와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던 청년들이 주로 아나키즘을 수용하였다. 이들 한인 청년 아나키스트들은 왜로군국주의 체제를 구축한 동경 한가운데에서, 바로 적의 심장부에서 사상 단체와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각종 사상운동 및 노동운동 등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왜로 경찰의 감시, 탄압, 압제 속에서도 대항한 투사들이었다.

1920년 왜국으로 건너간 최낙종 선생이 어떤 경로로 아나키스트가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드러난 활동으로 그는 아나키즘 단체인 ‘조선동흥 노동동맹’의 핵심멤버로써 흑우연맹의 기관지인 『흑색신문』의 인쇄를 담당하였다. 1932년 2월 인쇄소를 인수하여 ‘삼문사’의 실질적 발행인이었다. 이후 최낙종은 1930년 7월 22일부터 발간한 『흑색신문』의 인쇄를 담당함과 동시에 『시바우라 노동자 뉴우스』(1933년 창간), 『조선동흥노동뉴스』(1935년 창간), 『조선노동자협동조합뉴스』(1935년 창간)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인 유학생, 문인, 동인지 등 조선어 관련 문학 창작물을 발간하는 대표적인 인쇄소가 되었다. 실제로 조선어 창작이 금지되면서 ‘삼문사’에서 1940년 5월 8일 마지막 국문판 동인지 업이 인쇄된 것은 이 출판사의 상징적인 의미를 잘 나타내준다

1931년 만주침략 이후 왜로 군부의 정치 발언권 증대와 더불어 헌병의 사상·정치 경찰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감시와 탄압이 더 본격화 되면서* 1936년 3월 핵심조직인 흑우연맹이 해산되고, 4월에 동흥동맹 해산, 5월 『흑색신문』 폐간으로 이어진다.

나라잃은시대 활판을 한다는 것은 많은 재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자금을 어떻게 마련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고성신문』에 소개된 자료를 참고하면 17세 아래인 막냇동생 최낙봉 선생이 고물상과 자전거방 등을 운영하며 모은 자금으로 소개되어 있다.**

‘삼문사’는 황순원의 시집 방가를 비롯하여 이후 이용악 시집 『분수령』과 『낡은 집』 그리고 김유정의 『동백꽃』, 전한촌의 『무궤열차』*** 등을 출간하였다. ‘조선어 작품집’ 출간이 검열 등의 탄압으로 점점 어려워지던 시기에 단 한 글자도 왜어 사용을 하지 않고 우리말 출판을 고집하였다. 출판사를 운영하며 벌어들인 돈은 조선유학생과 광복항쟁자금으로 내놓았다.

최낙종, 그는 문학인은 아니었지만 조국이 광복을 찾는 길은 글쓰기로 증명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기꺼이 문학인들의 활자매체가 돼 주었다. 말과 글은 우리의 얼을 담는 그릇이었고 그에게는 종교와도 같은 것이었다. 지배받는 나라의 백성으로 이국 땅에서 투쟁한다는 것은 질 것이 뻔한 싸움이었지만 옳은 길을 가는 신념은 굽히지 않앗다. 왜로군국주의 말 삼문사는 결국 폐쇄되고 최낙종 선생은 수차례 피체돼 옥고를 치른다.

옥살이가 거듭되면서 병이 쌓여 사경을 헤매는 형편이 되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생체 실험 주사를 맞은 것으로 추측된다고 하셨다. 그 주사는 같은 감옥의 사상범들이 여러 차례 맞은 것으로 진술하면서 밝혀졌다. 결국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광복을 두 달 앞둔 1945년 6월 8일 후쿠시마에서 영면하셨다.

광복 후인 1945년 12월 26일 도쿄에서 추도회가 열린다. 우익교포단체인 조선민중신문사장 이윤우가 추도사를 낭독했다. 조선건국촉진회 소속 박열 선생은 친필 추도사를 헌정했다. 박열은 막냇동생이 추도회 참여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최낙종의 활약을 짐작해 볼 수 있는 행사였다.

가족을 뒤로하고 나라를 선택한 대가는 가혹했다. 가세는 기울고 이웃의 멸시 관의 감시를 견디지 못하고 가족은 부산으로 향했다. 손자 최연도 옹은 수십 년을 이방인으로 떠돌다 고향에 돌아와 소일하며 지내신다. 5살 적에 대한해협을 건너 할아버지 유해를 모시고 왔다. 불편한 몸이지만 조부를 향한 애국심을 이야기하실 때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조부님의 광복항쟁으로 할머니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생을 하셨다며 울컥하실 때는 질문이 글쓴이 호기심만 채우려 한듯하여 죄송스러웠다.

3. 아나키스트 최낙종이 꿈꾼 세상

최낙종은 왜국 한복판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와 대한민국의 광복을 위해 치열하게 싸운 한국 아나키스트 투쟁의 역사를 쓴 핵심 인물이었다.

아직도 많은 아나키스트가 뚜렷한 항왜 공적에도 광복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흑로회, 흑기연맹, 진우연맹 투쟁 등으로 인해 많은 아나키스트가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순국하였으나, 후손조차 찾을 수 없어 진실 규명마저 요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낙종 선생은 고성 광복항쟁을 이끈 공을 인정 받아 1980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아 집안 가보가 되었다. 연구도 계속 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또한 식민자 제국의 심장 동경에서 재왜 동포들이 자유와 자립을 위해 벌였던 투쟁 현실을 담아낸 아나키즘 문학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것도 남겨진 과제이다.

역사 속에서 개인은 이름도 얼굴도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 개인은 전체를 이루며 전체는 개인의 작은 발자취 하나하나에 영향을 받아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하고 꿈꾸는 혁명과도 같은 일을 해냈다. 고성 사람의 당당한 자유의지는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 속으로 녹아들었다. 역사는 그들의 것이고 그 분들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 몫이라는 책임을 안고 돌아왔다.

집 마당 텃밭에서 키운 고구마 곱게 깎은 단감을 맛보라고 싸 주시는 내외를 보며 마음이 훈훈해졌다. 조부님을 자랑스러워 하면서도 당당함 겸손함도 끝까지 유지하셨다. 굴 안에서 평화로운 삶이 계속되기를 염원했다. 돌아오는 길은 하루 일정을 마무리 지은 공사 탓에 마산으로 매끄럽게 밀어 주었다.

<주>
*박태일, 『한국 지역문학 연구』, 아나키스트 시인 전한촌과 시집 『무궤열차』,1930~1940년대 동경 간행 한글 시집 연구1 p1156쪽 참조.
**
『고성신문』, 2017828일자.
***
박태일, 앞의 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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