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의 정년 퇴임식
박 태 일
정년 퇴임식을 예정대로 한다는 통지가 왔다. 중국 무한폐렴 탓에 뒤숭숭한 날들이 겨울 산그림자처럼 사람 마음을 뒤덮고 있는 때다. 어지간한 모임은 물리는 분위기다. 새벽에 집을 나서는 버릇에 익은 터라 퇴임식 시간인 11시에 맞추어 가려니 여유가 있다. 집에서 아침까지 먹고 느긋하게 나서리라 작정했다. 그런데 어느새 시침이 9시 쪽에 다가서고 있었다. 시내버스로 사상시외버스정류장을 거쳐 다시 남마산행 버스를 타고 학교 밑 마산남부정류장에 내리면 빠듯할 것 같다. 할메죽집에서 죽 한 그릇을 비우고 그렇게 연구실로 걸어 올라갔던 세월이 벌써 몇 년이었던가.
두 시간 안에 닿을 수 있을까? 퇴임식에 늦을 수도 있겠다. 하는 수 없이 아내에게 승용차로 같이 갔다 오자고 말했다, 웃으면서. 아침을 먹다 문득 아내가 한 마디를 던진다. 교수로서 마지막 출근이 될 터이니 자신이 차로 데리고 갔다 데려오고 싶다고. 무슨 불편할 일을 스스로 벌이느냐고 나는 손사래를 쳤던 터다. 그럼에도 내심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는지 모른다. 불편을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과 함께 갔다 돌아오고 싶은 마음. 아내로서는 가장이 오랜 일터를 마무리 짓는 날이니 끼쳐오는 감회를 그렇게 풀고 싶었을 수 있다. 뜻밖이지만 고맙다.
마산으로 떠나 장유 굴을 지나면 벌써 갯가 물냄새가 느껴진다. 평소 사상에서 시외버스를 타면 바로 눈을 감고 짧은 선잠을 즐기는 시각이었다. 아내와 자잘한 이야기를 이저리 등성이 봄 벚꽃 냄새처럼 가볍게 날렸다. 마창대교를 건너서면 두척산 아래 학교가 보인다. 아내 차로 왔지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로 퇴임식장으로 가기에는 시간이 어중간하다. 버릇처럼 문과대학 2층 연구실로 걸어 올라간다. 텅 빈 복도, 인기척이 없다. 연구실 앞까지 갔다 문을 따고 들어서려다 그만 돌아서 지나쳤다. 늘 드나들었던 화장실에 들린 뒤 문과대학을 나서 바로 본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4층 국제회의실, 식장에 이르니 10분 남았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 어라, 10시 50분까지 오라 했었는데. 잠시 기다리니 교수협의회 직원이 들어선다. 그도 머뭇거린다. 11시를 2-3분 정도 남긴 시각인데도 사람들이 들어서지 않는다. 그제서야 사전 모임 장소가 따로 있으리라는 생각이 머리를 쳤다. 2층 교무처장실로 바삐 내려가니 퇴임 교수들이 모여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뜻밖에 혼자 늦어버린 꼴이다. 정년을 같이 맞은 문과대학 두 교수도 웃으며 앉아 있다. 아, 몇 해 만에 얼굴을 마주친 교수도 보인다. 명예교수 명함통 하나를 건네 받는다.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퇴임식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사람씩 공로상장을 준다. 가장 오래 일한 교수가 39년이다. 다음을 38년이 이어 받는다. 정년 교수에게 상장을 건네는 총장의 모습이 많이 늙었다. 저 양반 나이가 이제 77세인가? 나와는 띠 동갑이 된다고 들었던 것 같다. 나는 32년……. 1988년 3월 전임강사대우로 시작한 날부터다. 임용을 통지 받는 자리에서 전임강사가 아니라 대우로 첫 1년을 일해야 한다고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쑥 내밀어 당혹하게 만들었던 그때 교무처장. 총장과 고교 동창이라고 했다. 퇴임 교수 한 사람 한 사람 봉투까지 건넨다. ‘퇴직위로금’이다. 정년이 위로 받는 일일 수도 있겠다 싶다. 얼마나 넣었을까.
점심은 월남동성당 가까운 함흥집. 인사과 직원이 자기 차로 몇 사람씩 태워준다. 불고기에다 냉면을 얹어 먹었다. 마산에 온 처음 몇 해는 가끔 오갔던 곳이다. 학교 행사 뒤에 들리던 식당 가운데 하나였다. 걸음을 하지 않은 지가 얼마나 되었나. 시간 떼우는 이야기가 앞뒤 없이 이어졌다. 총장이 먼저 자리를 뜨면서 명예퇴직을 하게 된 모 교수에게 한마디 건넨다. 싫은 정 고운 정, 그냥 덕담이다. 내게도 한 마디 걸친다. 후임을 정규직으로 뽑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언제 내 후임을 뽑아 달라 간청이라도 했던가. 나가는 사람, 나하고는 연이 없는 일일 뿐이다. 내 전공이 시인지 소설인지 그런 것도 모를 뿐더러 중요하지도 않을 터다.
학교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한 교수가 식장에서 받은 공로상장 끼움판을 직원에게 돌려 준다. 보관이 힘들어서……. 나는 멈칫거렸다, 집으로 가지고 가면 다 쓰레긴데. 연구실에서 마지막으로 책 몇 권을 더 골랐다. 첫 교수 임용할 때 샀던 쇠 캐비넷 두 개는 버리기로 한 그대로 비어 있다. 아버지 주선으로 산 것이어서 추억이 서린 물건이다. 그것도 잊을 때가 되었다. 부산 책창고로 가져가면 자리는 나겠지만 뒷날에는 다시 짐이다. 사무실 조교를 불러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세 해 동안 내 개인 일도 적지 않게 시켰던 졸업생이다. 대학 첫 학년 지도교수가 나였다.
아내는 빈 시간을 갯가로 나가 한 바퀴 돈 모양이다. 다시 마창대교를 타고 부산으로 넘어왔다. 퇴임식, 마지막 퇴근길은 아내 뜻대로 된 셈이다. 집이 있는 부산과 일터 마산은 내게 오랜 세월 선이 아니었다. 따로 떨어진 두 점……. 생각하면야 그 사이, 왜 너르고 긴 추억의 끈이 없겠느냐마는. 그저 그렇게 덤덤하게 느끼며 살았다. 퇴근 뒤 마산 바닥을 쏘다닐 일도 없었으니 점이라는 그것도 크기가 만만할 따름이다. 아내와 함께 돌아오면서 모처럼 부산과 마산 두 점 사이에 긴 현을 하나 그은 듯한 느낌이다. 그 줄이 팽팽히 울면서 내는 가는 소리.
내 시에도 정년 퇴임식 같은 게 있을까? 젊을 때부터 살아 시집 10권은 내고 죽겠다고 말하곤 했다. 이제 그 말에 책임을 질 나이다. 정년을 하면 오로지 시창작에만 골몰하게 되리라 지인들에게 호기롭게 뱉기도 했다. 그럼에도 퇴임식을 마친 뒤 한 달도 되지 않아 벌인 일이 벌써 한둘 아니다. 연구재단 연구비 신청까지 더했다. 북한 지역문학 연구를 마무리하려면 바깥 지원이 필수적이다. 거기다 오래 이어온 평생교육원 시창작반 운영. 그것에다 낮반으로 ‘지역과문학실천’이라는 이름의 새 강좌를 열었다. 무한폐렴 탓에 개강이 또 늦어질지 모르겠다.
바쁜 일은 바쁘게, 뒤로 물려 놓을 일은 또 그렇게 마음 귀퉁이에 올려 두면 될 것이다. 시집 10권에는 이제 4권 남았다. 잉어가 물길을 따라 위로 차 오르듯 두 번만 더 큰 용틀임을 하면 될 일 같다. 지느러미 떨어져 나가고 꼬리가 성큼 잘리더라도 어쩔 수 없다. 골짝물이 마르지 않기만을 바랄 일이다. 시집 내기가 훨씬 좋아진 세상이다. 읽는 이, 사 보는 이가 적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어차피 현실 독자의 대중적 기호를 염두에 두고, 그런 취향을 겨냥해 쓸 힘은 없는 터다. 내 시집 한 권이 더 나오고 나오지 않는 일이 무슨 대수랴.
세상은 텍스트, 기호를 생산하고 누리는 데는 관심이 없다. 그 바깥의 명성을 재생산하고 소비하는 일에만 인이 박혔다. 시가 소중하다면 무엇보다 내가 내 시를 생산하는 주체가 될 일이다. 바짝 정신 차리지 않으면 금방 떠내려 간다. 아차 하는 순간 바닥에 코를 처박고 팔목을 갈면서 뒹구는 산길 달리기와 다를 바 없다. 먼 달림길일수록 넘어지고 미끄러질 확률은 높다. 내 시의 정년 퇴임식에는 아내가 무얼 거들 입장이 아니다. 오로지 내가 마련하고 끌어갈 그 일. 최소한 안녕, 내가 나에게 인사 한 마디 건넬 짬이 주어지는 아침, 그런 아침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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