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라일락을 피우며, 추억과/욕망을 섞으며, 봄비로/생기 없는 뿌리를 깨운다.’ T.S 엘리엇은 왜 ‘황무지’에서 이렇게 4월을 잔인한 달로 노래했을까?
433행이나 되는 장시 ‘황무지’는 서구 문명의 비극성을 노래하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평가한다. 종교적 신앙을 잃고(不信), 생식의 기쁨도 잃고(不毛), 썩어서 사라지길 거부해 재생도 불가능한(不活) 당시 서구 문명의 비극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봄의 중심인 4월은 생식과 부활(復活)의 계절이다. 하지만 서구사회의 문명 상태는 진정한 생식과 재생이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보았기에 봄은 오히려 잔인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며 추억과 욕망을 일깨우지만, 오히려 아픈 상처만 덧나게 하기에 더욱 잔인하며, 나아가 봄비로 생기 없는 뿌리를 깨우는 절망적 상황은 잔인함의 극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시 해석에 반해 미국 시카고대 영문학 교수 제임스 밀러는 『T. S. 엘리엇의 개인적 황무지』라는 책에서 그 숨겨진 이유를 달리 밝혔다. 밀러 교수는 엘리엇에 대한 전기적 연구를 통해 그가 1910년 프랑스 유학 시절 만난 장 베르드날이란 의대생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꼈음을 알아챘다. 엘리엇보다 두 살 연하인 베르드날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으로 참전했다가 1915년 4월 발발한 갈리폴리 해전에서 전사했다. 충격을 받은 엘리엇은 그해 발레리나 출신인 비비언 헤이우드와 쫓기듯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불행했고, 1921년 부부관계를 회복하고자 스위스 로잔 호숫가에서 요양 중일 때 ‘황무지’를 집필했다.
엘리엇은 1934년 ‘늦은 오후 라일락 가지를 흔들며 룩셈부르크 공원을 가로질러 오던 한 친구가 있었네, 훗날 갈리폴리의 진흙에 섞여 들어간 한 친구가 있었네’라는 글을 남겼다. 4월이 왜 가장 잔인한 달인지, 라일락이 왜 추억과 욕망의 꽃인지가 친구에 대한 엘리엇의 기록을 엿보면 그 이유가 설명된다는 것이다.
밀러 교수는 이를 토대로 ‘황무지’를 지배하는 상실감과 잔인함은 서구 문명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베르드날을 잃은 개인적 감정이 내포된 시라고 주장했다. 엘리엇 자신이 “황무지는 시대에 대한 비판의 산물이라기보다 개인적인 시”라고 밝힌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보았다.
엘리엇은 개인적 감정을 반영하되 독자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객관적 상관물’의 발견을 시작(詩作)의 출발로 본 주지주의 시인이었다. 따라서 ‘황무지’는 엘리엇의 개인적 상실감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문명이 겪은 상실감과 결부되어 나타난 문학작품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시구는 결국 전쟁으로 인한 생명의 살상이 빚은 비극을 머금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현재 우리가 처한 지구촌의 상황이 T.S 엘리엇이 노래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을 이미 넘어서 있다는 점이다. 이제는 4월과 관계없이 매일의 일상에 잔인함이 상존하고 있다. 지구촌은 위험 사회로 명명된 지 오래되었으며, 지구촌 곳곳에서 지속되고 있는 전쟁, 기후 위기로 인한 재앙과 천재지변은 인간의 생명을 파멸로 이끌고 있다. 우리의 시선을 지구촌에서 한국 현실로 돌려보아도 역시 다르지 않다. 천민자본주의의 가치관을 벗어던지지 못한 우리 사회는 물신주의에 취해 생명 경시 사상이 극에 달해 있다. 자살률 세계 1위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은 여전하고, 세월호 참사의 상흔이 우리 사회에 짙게 남아있는데 또다시 이태원 참사가 터져버렸다.
그런데도 소위 지도자라 칭해지는 이들은 시간이 흘러 하루라도 빨리 국민의 기억에서 사라지기만을 기대하고 있는 형국이다. 어디 이것뿐이랴. 부·울·경 인접 지역에 산재한 핵발전소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태로 수명연장만을 고집하고 있고,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핵폐기물은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고 임시방편에 급급하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정부나 부산시는 이에 대한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방류된 핵 오염수에서 잡아 올린 수산물을 먹고 살아야 할 다음 세대들은 어찌 될 것인가? 이는 분명 기성세대가 미래 세대들에게 넘겨주는 잔인함의 한 극치일 것이다.
이제 일상이 되어버린 인간사에서의 잔인함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인지가 인류의 절체절명의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행복이란 연목구어에 불과하다. 잔인함이 일상에 팽배해진 현실 속에서 목요학술회의 존재의의는 과연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1970년대 말 척박한 묵정밭 같은 부산 문화판에 씨를 뿌리고 가꾸었던 목요학술회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시민들을 문화적 소양으로 순화시켜왔던 그 생명력을 목요학술회는 지금 제대로 유지하고 있는가? 지금이라도 우리는 지역 사회에 팽배해 있는 잔인함을 사랑의 묘약으로 털어내는 실천적 활동을 시작해야 한다. 잔인한 달 4월은 우리 자신을 스스로 냉정하게 돌아볼 시점이다.
<남송우 부경대학교 명예교수 / 시민시대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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