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와 삼천포(진간선)간 기차 때문에 만들어진 비속어로 '잘 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이 있는데 삼천포는 경상남도 사천시의 핵심 해안도시다. 삼천포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나룻배가 오가던 곳으로 신라시대는 사물현에 속해있었다. 나룻배를 타고 내리던 포구였다. 이곳 나루터에서 배를 타면 한려수도 남해를 거쳐 섬진강 하구에서 하동 악양까지 뱃길이 열려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화물을 수송하는 곳으로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삼천리’란 마을이 생기고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삼천리란 지명은 이곳에서 고려의 수도 개성까지의 육로거리가 삼천리라서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1885년부터 사천군의 삼천리면이 되었다가 1931년 삼천포읍이 되었고, 1956년에 삼천포시가 되었다. 1960년대부터 삼천포항구가 되어 부산, 마산, 여수로 여객선이 운행하면서 유동인구가 날로 증가했다. 청정한 노량해협의 어획량이 크게 늘어나 활어와 가공된 쥐포 수출로 경제 호황기를 맞이한 삼천포항은 여객선과 화물선이 오가는 무역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때 유명 가수 은방울 자매가 <삼천포 아가씨>를 불러 삼천포를 방방곡곡 널리 알리는데 한몫했다.
비 내리는 삼천포에 부산 배는 떠나간다.
어린 나를 울려 놓고 떠나가는 내 임이여
이제 가면 오실 날짜 일 년이요 이 년이요
돌아와요 네 돌아와요 네 삼천포 내 고향으로
조개껍질 옹기종기 포개놓은 백사장에
소꿉장난하던 시절 잊었나 임이시여
이 배 타면 부산 마산 어디든지 가련마는
기다려요 네 기다려요 네 삼천포 아가씨는
-‘삼천포 아가씨’ 노랫말
박재삼 문학관이 있는 노산공원은 오래된 수목들이 울창하고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산책로를 따라 바닷가로 가면 갯바위에 삼천포 아가씨 동상이 있다. 길을 걷는 동안 가로등마다 설치된 스피커에서 ‘삼천포 아가씨’ 노래를 하루종일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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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라는 말이 있다. 보통 무엇에 빠진다는 건 어디에 반했다거나 열심이라는 표현에 쓰이는 말이다. 이 말은 어떤 대상을 두고 대화를 하다가 이야기가 본질을 벗어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또 어떤 일이 잘 되어가다가 갑자기 어긋날 때 순간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말이 생기게 된 원인을 기차가 제공했다는 것이다.
1965년에 경북 김천시와 경남의 삼천포시 간 철도가 건설되었다. 진주시 개양역과 삼천포시의 삼천포역 사이에 ‘진삼선’ 기차가 개통되면서 부산을 출발해 마산을 거쳐 진주로 가는 기차에는 삼천포로 가는 손님도 진주로 가는 손님도 함께 탔다. 기차가 진주 개양역에서 진주행과 삼천포행 객차를 분리하여 운행하는데, 이때 방송을 통해 진주행 손님과 삼천포행 손님은 각각 몇 호차로 옮겨 탈 것을 알리는 안내방송을 했다. 이때 진주로 가야 할 사람이 깜박 실수로 내리지 않고 있다가 엉뚱하게 삼천포로 가버리게 된 것인즉, 삼천포로 빠진 것이다. 장꾼이 장사가 잘되는 진주로 가려다 길을 잘 못 들어 삼천포로 빠졌다거나 아무튼 무엇을 그르친 것에 대한 비속어다.
한편 진해에 해군기지가 생긴 이래 해군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도 한다. 휴가를 나온 해군사병이 귀대하면서 삼랑진에서 진해 가는 기차를 갈아타지 않고 잘못하여 삼천포행을 갈아탄 바람에 귀대 시간을 놓친 병사들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삼천포 사람들은 이 표현을 지역차별로 오해하거나 그렇게 여겼고 어찌됐건 기분 좋게 들리는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2011년 어느 방송국에서 이 표현을 썼다가 삼천포 사람들과 지역 국회의원 등이 항의를 했고, 한국방송윤리위원회는 심의회를 통해 이 표현을 비속어로 규정하고 방송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1980년대 진주 삼천포 간 고속도로가 열리고 시외버스터미널이 생기면서 진주시와 삼천포시를 연결하던 ‘진삼선’이 사라졌다. 삼천포역도 15년 만에 폐역이 되었다.
기차가 들어왔으면 좋겠다
대숲과 코스모스를 휘저으며
어디서 오래도록 덜컹거리며
나를 싣고 왔듯 사람들이 몰려왔으면 좋겠다
어둠 속을 달려온 시커먼 그 쇳덩이가
쉭쉭, 숨을 몰아쉬는 동안
큼직한 보따리와 흰옷의 사람들이
시끌벅적 이 바닷가에 펼쳐졌으면 좋겠다
기차가 들어왔으면 좋겠다
자가용은 너무 미끈하고
핸드폰은 점점 작아지고
디지털의 표정, 그 생각은 너무나도 엉뚱해지고
그 꿈들은 세련되고 약아빠졌으니
육중한 열 량 스물 량 기차가
거친 쇳내를 풍기며 들어서는 바닷가 역사
사람들이 사철나무 울타리에 깃들어
아침과 햇살과 바다 물결을 길게 이고지고
사람들이 왔다야! 하며
흥청흥청 장터처럼 모여들었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박구경, ‘기차가 들어왔으면 좋겠다’ 전문
사천시 두량리 보건진료소 소장을 지낸 박구경 시인은 기차의 기억을 시로 남겼다. 삼천포는 본래 행정의 중심지로 발전한 곳이 아닌 포구 기능으로 성장한 곳이었다. 1995년 사천군과 통합되어 삼천포는 사천시가 되었다. 한려수도의 중심 기항지로 서부경남의 관문항구도시 삼천포가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사천군과 통합되어 도농통합시인 사천시가 된 것이다.
이름을 삼천포시로 하려 했으나 사천군민들의 반대가 컸다. 결국 시민투표에 붙여졌다. 삼천포시는 인구가 사천군보다 많았음에도 투표율이 저조했고, 사천군민들의 투표율은 상당히 높았다. 결국 표차로 삼천포시가 아닌 사천시가 된 것이다.
밤바다에서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질정(質定)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아야 하리.
천하에 많은 할 말이,
천상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 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박재삼(1933~1997), ‘밤바다에서’ 전문
어느 지역을 말할 때 그 지역과 장소를 대표하는 이름과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박재삼 시인은 일본 도쿄에서 막노동을 하던 아버지와 세 살이 되던 해 귀국하여 어머니의 고향인 삼천포에 자리를 잡는다. 아버지는 여전히 지게꾼 막일을 나가고, 어머니는 생선을 떼어다 파는 장수로 생계를 유지했다. 시인은 중학교 진학을 못 하고 삼천포여자중학교 사환이 된다. 삼천포여중의 교사였던 시조 시인 김상옥을 만나게 되는데 이 만남은 시인이 시인을 이끄는 운명적 계기가 된다.
박재삼은 삼천포중학교 병설 야간부에서 주간으로 옮기고 제1회 개천 예술제 백일장에서 시조 ‘촉석루’로 차상을 받는다. 4년제 중학을 마치고 1951년 삼천포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한 시인은 1953년 수석으로 졸업한다. 박재삼 시는 정한의 토속적 미학과 음률을 되살린 절창의 서정시로 정서적 근원인 ‘한의 정서’라고 비평가들의 평가를 받는다.
◇ 박정애 시인 : ▷기장 출생 ▷199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199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집 《개운포에서》, 《바다악사》 외 8권. ▷이주홍 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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