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관 오디세이 - EPR 논쟁, 슈테른-게를라흐 실험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가 ‘상보적인 두 가지 물리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아는 것이 불가능함’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물체의 진정한 속성은 여전히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한 의문은 쉽게 가시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미국에 정착한 지 3년째인 1935년 그의 연구 동료와 함께 이 같은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의구심을 파고들며 양자역학의 완전성을 위협하는 강력한 논증, 즉 EPR(Einstein, Podolsky, Rosen)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물리적 실재에 대한 양자역학적 기술은 완전한가(Can Quantum Mechanical Description of Physical Reality be Considered Complete)」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물리학 논문지인 『Physical Review』(47호)에 게재되었습니다.
보어는 이에 대한 반박을 그해 『Physical Review』 48호에 같은 제목으로 실었습니다. 이후 아인슈타인 일행과 보어를 비롯한 양자역학 옹호자들은 양자역학의 완전성 여부를 놓고 50년 동안 세기의 논쟁을 벌였습니다.
물리학 천재들이 첨단이론, 그것도 매우 철학적인 이론의 타당성 여부를 놓고 다투는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논쟁에 대해 일반인들이 그 내용과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특히 아인슈타인이 2차례 논쟁에서 패배한 이후 내놓은 EPR 논증은 정교하기 이를 데 없어 그 정수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흥미진진한 세기의 논쟁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 기초지식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전자 상자 사고실험 - 비국소성, 비실재성
우리는 앞에서 전자 하나가 들어있는 상자를 절반씩 A, B로 나누면 전자파동은 어떻게 될까 하는 '상자 안의 전자' 사고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그 사고실험을 상기해 봅니다. 전자는 어디에 있을까요? 전자가 입자이므로 나누어진 어느 한 쪽에 있을 거라는 예측은 틀렸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압니다.
전자가 어디에 있는지는 상자 A, B를 열어보는 순간 결정됩니다. 그러나 열어보기 전에는 어떤 상태일까요? 한 상자 안의 전자파동이 반으로 나누어졌다는 것은 이 전자가 반으로 쪼개졌다는 것이 아니라 전자가 발견될 확률이 반으로 나누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전자는 어느 쪽에서도 발견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상자 A의 전자파동은 전자가 B에서 발견될 상태와 A에서 발견될 파동이 겹쳐져 있는 상태이며, B의 전자파동도 마찬가지로 A, B에서 발견될 상태가 겹쳐져 있습니다.
자, 이제 상자 A를 지구에 두고 B를 빛이 200만년 동안 날아가야 도달하는 우리은하계 너머 안드로메다은하에 놓아두었습니다. 만약 지구의 상자를 열어 전자의 존재를 확인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안드로메다은하에 있는 B의 상태는 전자가 없는 것으로 ‘즉각’ 결정됩니다.
지구에 있는 상자 A의 상태가 200만 광년 떨어진 상자 B의 상태를 순간적으로 결정한다니! 이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 것입니다. 게다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물체의 이동이나 신호의 전달은 빛의 속도(초속 30만km)보다 더 빠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양자론에서는 상자 A의 전자 상태가 동시에 B의 전자 상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요.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실험결과도 이를 확인해줍니다.
이것은 국소성(locality)의 원리를 위배한 비국소성(nonlocality)의 예입니다. 이는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비국소성은 코펜하겐 해석의 ‘파동함수 붕괴’라는 가설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즉, 양자계는 파동함수로 기술되고, 이것은 가능한 여러 상태가 아무리 공간적으로 넓게 퍼져 존재한다 하더라도 측정의 순간 곧바로 한 곳으로 수렴된다고 설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고실험은 또 양자역학의 비실재론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상자를 열기 전에 어느 곳에 전자가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상자를 영원히 열지 않는다면 전자가 있는 장소는 영원히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말했습니다. “양자역학의 가정이 옳다면 달은 우리들이 보았기 때문에 그곳에 있고, 우리들이 보지 않을 때에는 그곳에 없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분명 틀린 이야기이고, 우리들이 보지 않을 때에도 변함없이 같은 장소에 있을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이 말에 대해 보어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습니다. “아인슈타인 박사님과 내가 그리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달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달이 그곳에 있는지 누가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달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은 달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과 보어는 지금 양자역학의 비실재론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인간의 관측과 관계없이 달이 존재하는 것처럼, 전자도 어느 상자에 어떤 상태로 있는지 확실하게 결정되어야 한다는 실재론을 주장합니다. 이에 반해 보어는 관측을 하기 전에 물리적 실재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전자는 물론 달조차도 관측했을 때 논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스핀보존 사고실험 - 비국소성
이제 EPR 논증에 한발 더 다가서는 사고실험을 살펴보겠습니다. 두 스핀(spin, 회전)량의 합(가령 0)이 보존되는 한 쌍의 입자를 생각합니다. 이제 이 두 입자를 앞의 전자상자 사고실험에서처럼 하나는 지구에, 다른 하나는 안드로메다은하에 가져다 둔 다음 지구에 있는 입자의 스핀 상태를 통해 저쪽 입자의 스핀 상태를 확인합니다.
이 사고실험을 분석하기에 앞서 스핀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스핀이란 전자와 같은 미시세계 입자들이 갖는 에너지, 운동량 등과 같은 물리량 중의 하나입니다. 스핀은 임의의 회전축에 대해 시계방향 또는 반시계방향으로 회전하는 것을 말하는데, 거시세계의 ‘회전’과는 다른 독특한 성질이 있습니다. 즉, 회전 속도는 변하지 않지만 회전축의 방향은 외부의 영향에 따라 수시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핀은 기묘한 양자론의 세계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스핀의 성질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유명한 물리학 실험이 있습니다. 원자의 자기 모멘트와 스핀이 양자화되어 있으며, 특정 회전축의 스핀에 대한 측정 행위가 다른 회전축의 스핀 정보를 파괴한다는 사실을 증명한 ‘슈테른-게를라흐 실험(Stern–Gerlach experiment)’입니다. 이것은 독일의 물리학자 슈테른(Otto Stern)과 게를라흐(Walter Gerlach)가 수행했으며, 양자역학의 가장 근본적인 실험 중의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은(silver) 원자에 자기장을 걸어주면 마치 체로 큰 굵기의 모래를 걸러내듯 서로 다른 스핀을 가진 은 원자를 분류해 낼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런 장치를 사용하여 ‘위’ 방향 스핀을 가진 은 원자와 ‘아래’ 방향 스핀을 가진 은 원자를 분류해 냅니다. 위 방향 스핀을 가진 은 원자를 모아 위-아래 방향 스핀 분류기에 넣으면 모두 위 방향으로 빠져나옵니다.
이제 이들 위 방향 스핀 은 원자를 오른쪽-왼쪽 방향 스핀 분류 장치를 통과하게 해보겠습니다. 그러면 이 중 일부는 왼쪽으로 또 일부는 오른쪽으로 나올 것입니다. 다시 이 장치에서 왼쪽으로 나온 왼쪽 스핀 은 원자들을 다시 위-아래 스핀 분류 장치를 통과하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우리는 이미 ‘위’ 방향 스핀을 가진 은 원자를 골랐으므로 ‘위’ 방향으로 나올 것이라고 기대할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은 원자들은 위 방향과 아래 방향으로 정확히 절반씩 갈려나옵니다!
앞서 왼쪽 스핀 원자들 중 ‘위’ 방향으로 나온 은 원자를 또다시 왼쪽-오른쪽 스핀 측정기에 넣어 분류하면 이들은 과거에 자신의 정체성(왼쪽 방향 스핀)을 잊어버리고 처음처럼 왼쪽과 오른쪽 방향으로 정확하게 절반씩 갈라져 나옵니다.
위의 실험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거시세계의 속성과 확연하게 다른 것입니다. 여러 가지 크기의 조약돌을 일정한 크기의 그물코를 가진 체로 걸러내는 일을 생각해봅니다. 크기가 다양한 조약돌 20개를 체로 걸렀더니 10개는 남고, 10개는 빠져나갔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물코가 손상되지 않는 한 이 같은 작업을 반복해도 결과는 처음과 같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이제 체를 통과한 조약돌 10개를 모아 각각의 질량을 재서 평균보다 무거운 것과 그 이하인 것의 두 부류로 나눕니다. 이제 평균보다 무거운 조약돌을 다시 아까와 같은 크기의 그물코를 가진 체로 거릅니다. 이들 모두가 그물코보다 작은 조약돌이었으니 이번에도 당연히 모두 체를 통과할 것입니다. 조약돌의 크기는 질량을 잰 후 변하지 않고, 반대로 조약돌의 질량 또한 크기를 잰 후에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이는 각 조약돌이 고유한 ‘크기’와 ‘질량’이라는 물리적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의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을 통해 우리는 양자역학에서 다루는 대표적인 물리량인 스핀은 이런 고유한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은 원자의 스핀은 왜 고전역학적인 속성처럼 일관되게 유지되지 않고 수시로 변할까요? 은 원자의 위-아래 스핀을 잰 후 다시 왼쪽-오른쪽 스핀을 재면 ‘측정의 영향’에 의해 앞의 스핀 속성이 변한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조약돌은 크기를 잰 후 질량을 재었다고 해도 크기가 변하지 않는 거시세계와는 다른 상황입니다.
이것은 양자역학적인 현상에 대한 정석적인 해석입니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은 원자의 위-아래 방향 스핀과 왼쪽-오른쪽 방향의 스핀은 수학적인 방식으로 서로 관련되어 있는데, 한 속성에 대한 측정이 다른 속성을 가질 확률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그 영향의 물리적 메커니즘에 대해서 양자역학은 아직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스핀보존 사고실험으로 돌아가 봅니다. 지구에 있는 입자의 스핀이 +1이라면 안드로메다은하에 있는 입자의 스핀은 얼마일까요? 이건 쉬운 문제입니다. 스핀 총합이 0으로 보존된다고 했으므로 안드로메다은하 입자의 스핀은 -1입니다. 이 사고실험에서도 앞의 전자상자와 같이 비국소성이 문제가 됩니다. 지구에 있는 입자의 스핀을 확인한 행위가 어떻게 200만 광년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입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단 말일까요?
이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양자론의 해석을 반박할 수 있습니다.
‘안드로메다은하에 있는 입자의 스핀이 -1인 것은 지구에 있는 입자의 관측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스핀 값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우리가 그 입자를 안드로메다은하로 가져갈 때 스핀이 -1인지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한마디로 양자역학적 현상의 기묘함이 단지 우리의 ‘무지’에 의한 것일 뿐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는 너무 순진한 반론입니다. 이 반론을 잠재울 실험적 증거가 무수히 많기 때문입니다. 우선 앞에서 설명한 은 원자의 스핀 분류 실험을 스핀보존 사고실험에 적용해보겠습니다. 스핀 총합이 0이 되도록 서로 연관되어 있는 한 쌍의 입자를 하나는 지구에 또 다른 하나는 안드로메다은하에 두었습니다.
지구에 있는 입자의 위-아래 스핀 성분을 측정해 보았더니 위쪽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안드로메다은하 입자의 스핀은 아래쪽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 다음 지구에 있는 입자의 스핀 왼쪽-오른쪽 성분을 측정해 보았더니 왼쪽으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안드로메다은하의 입자는 오른쪽 스핀일 것입니다. 따라서 안드로메다은하의 입자는 위-아래 스핀 성분은 아래쪽, 왼쪽-오른쪽 스핀 성분은 오른쪽을 갖는다고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안드로메다은하의 입자를 확인해보면 짐작대로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안드로메다은하의 입자를 가져와 다시 한 번 앞에서와 같이 스핀 측정을 반복해봅니다. ‘원래의 스핀’이라는 논리대로라면 안드로메다은하에서 가져온 입자는 아래쪽 스핀 성분과 오른쪽 스핀 성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웬걸, 위-아래쪽 스핀 성분을 재어보니 위쪽 스핀과 아래쪽 스핀 값이 정확하게 반반의 확률로 나오는 게 아닌가! 물론 왼쪽-오른쪽 스핀 성분을 측정해도 왼쪽과 오른쪽 스핀이 반반의 확률로 나타납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올까요? 이미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이 말해주듯이 앞선 두 번째 측정 행위가 첫 번째 측정결과를 완전히 ‘지워’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는 입자가 고유한 스핀 속성을 갖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관측 행위가 관측 대상의 물리적 속성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불확정성의 원리의 한 결과로 해석됩니다.
앞의 스핀보존 사고실험으로 돌아가 봅니다. 아인슈타인 등 양자역학 반대론자들은 ‘어떻게 200만 광년이나 떨어진 안드로메다은하의 입자가 순간적으로 지구 입자에 대한 관측 행위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는가’라며 양자론에 해석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대한 새로운 해석 즉, ‘원래 안드로메다은하로 가져간 입자의 스핀은 -1이었는데 우리가 몰랐을 뿐이다’는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위의 예를 통해 옳은 해석이 아님을 확인했습니다. 지구의 입자에 대한 스핀 측정 행위가 순간적으로 먼 안드로메다은하 입자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독자들은 이를 단순히 가설이나 이론으로 치부한다면 이는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실제로 실험을 통해 확인된 사실입니다. 우리 우주에서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을 공격하기 위해 고안한 야심작인 EPR 논증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것은 당시 물리학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는데, 이 논쟁과 관련해 50년간 2만 건의 논문이 쏟아졌습니다. 가히 ‘세기의 논쟁’이었습니다.
이 논쟁은 1935년 불붙어 철학적 논쟁으로 비화되었다가 1960년 존 벨이 이를 실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벨의 부등식’을 고안해 내면서 물리적인 논쟁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논증에서 주장한 것은 “자연은 명확한 속성을 갖고 있는데 양자역학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기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1982년 프랑스의 실험물리 학자 알랭 아스페에 의해 이 논쟁은 실험적으로 확인되어 세계 물리학계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아인슈타인은 패했고, 이 우주는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신념과는 달리 ‘명확한 속성을 갖지 않은 불확정적이고 요상한’ 모습을 하고 있음이 확인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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