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는 철이 들까?

조송원 승인 2019.01.06 18:22 | 최종 수정 2019.01.06 18:37 의견 0

일상사 뭐 별 거 있나
오로지 내 형편에 따라 스스로 짝해 하는 일일 뿐.
일마다 좋고 궂음을 가리지 않으니
어디서든 성질 낼 일이 없네.
붉은빛과 자줏빛, 누가 위아래 따지는가?
구릉과 산덩이에서 먼지 세는 일 그만두게나.
신통이니 묘용이니 하는 도란 것,
그저 물 긷고 땔나무 하는 일상사라네.

日用事無別(일용사무별)
唯吾自偶諧(유오자우해)
頭頭非取捨(두두비취사)
處處沒張乖(처처몰장괴)
朱紫誰爲號(주자수위호)
丘山絶點埃(구산절점애)
神通幷妙用(신통병묘용)
運水與搬柴(운수여반시)¹⁾

내 하루에 묵은해가 갔고, 새해가 왔다. 해넘이와 해돋이에는 관심이 없다. 연말과 연초에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휴대폰을 비행기 모드로 전환해 둔다. 의례에 구속되는 번잡한 때에 혼자일 수 있다는 것, 직위職位 없는 무명인의 호사가 아니겠는가.

어제의 그 해가 오늘 새 해란 이름으로 서너 발 떠올랐을 즈음 느지감치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당 한 옆 수돗가로 가 찬물 두세 모금 마시고 고양이 세수를 했다. 다시 방으로 와 전기포트로 데운 물에 믹스커피를 풀었다. 피어오르는 커피 향, 좋구나.

운동화를 신고 모자를 쓰고 오리 길을 걸어 면소재지 상점에 가 담배를 한두 갑이 아니라 큰 맘 먹고 한 보루 샀다. 제야 곧 어젯밤에 새해에 대한 이런 저런 궁리를 하면서 생각해 둔 나머지이다. 담배를 즐기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해가 서산과 한 발쯤일 때, 누이동생과 매제와 조카가 집에 왔다. 필요한 게 뭐 있냐고 물었다. 당연히 있지. 이것도 어젯밤에 생각해 둔 것이다. 소주 두 병과 안주붙이. 조카가 흔쾌히 차를 몰고 사 왔다. 그들은 약속시간에 대기 위해 곧바로 떠났다. 다시 호젓한 혼자의 시간이다.

조송원 작가
조송원 작가

한때, 아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수행의 지표로 ‘술담배커피’를 꼽았다. 건강과 알찬 시간을 위해, 술을 멀리하고 담배를 끊고 커피 대신 숭늉을 마신다는 복안이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하니 역시 곰 다리는 네 개였다. 건강이 내 삶의 목적인가, 알찬 시간이란 또 뭣에 쓰는 물건인가? 물론 사람은 ‘자기합리화의 천재’이다. 내 의지가 박약함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나는 근본 물음을 하는 것이다. 사람은 보람과 즐거움이 없으면 죽은 나무 등걸이다. 모든 욕망과 즐거움이 거세된 목석이 수행의 목적인가.

적어도 아직 감기로 약 먹는 고생을 한 적이 없다. 따져보면 사흘에 여섯 끼 정도 먹지만, 막노동을 해도 체력이 부친 적도 없다. 더 나아가 ‘남들이 욕망하는 욕망을 욕망한’ 적도 드물다. 인간의 정신 에너지도 한계가 있다. 총량의 법칙에 지배 받는다. 술 담배 커피의 부정적 영향을 극복하기 위해 에너지를 낭비하면, 더 크고 중요한 부적負的 욕망을 제어해야 할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결과가 된다. 곧, 참기름 쏟고 깨 알 줍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의 한계를 안다. 술 담배 커피에서 쩨쩨한 즐거움을 얻는 게 내 행복의 한 밑돌이다. 내 물질적 토대를 넘어선 즐거움은 욕망하지 않는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의 투자로 최대의 즐거움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 나도 ‘합리적인 경제인’이다.

한 병은 부족하고 세 병은 넘친다. 소주 두 병이 딱 좋다. 좀처럼 집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러나 조카가 사온 소주를 혼자 마시면서, 이젠 집에서 마시는 경우가 잦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이도 새해에 대한 궁리를 하면서 내린 작심이다.

친구관계에서도 술자리에서는 술값 내는 친구가 대장이다. 얻어먹으면 졸개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의 잣대가 구부러진다. 할 말을 다 하면서 술값은 못 내는 사람을 좋아할 턱이 없다. 술이 고파 환장한 사람도 아니고 왜 그런 자리에 어울려야 하는가. 돌아보면 10에 7번은 술만 고픈 자리였을 성싶다.

1주일에 50시간은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불편했던 10에 7번 같은 술자리는 이제 안녕이다. 세모에 일찌감치 새해 첫날 점심 약속을 잡자는 친구와 선배의 제의를 딱 잘라 거절했다. 한 번씩은 술이 고프리라. 허나 무슨 문제이랴. 1만 원이 족하다. 집에 소주 두 병 사와 쟁여둔 삼겹살 구워 곁들이면 그만인 것을. 결과적으로 술자리 횟수도 줄이고, 빈말할 이유도 없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으니, 이 아니 묘안인가.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다’(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²⁾는 공자의 주장이 어렴풋하나마 감이 잡힌다. 독서란 저자와 성찰적 대화이지만, 결국은 남의 이론을 배우고 남의 주장을 듣는 과정일 뿐이다. 아직까지는 생각하기보다는 읽는 데 주안점을 뒀다. 지식은 밖에서 올지언정 지혜는 안에서 오는 열매인데도 말이다. 이젠 생각 좀 하고 살자, 다짐한다. 그렇다고 참선 등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평소 1만보를 걸었다. 1만5천보를 걸으련다. 일상과 유리된 건강법이나 이론은 공허하다는 게 평소 지론이다. 걸으면 건강 챙기게 되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건강과 생각하기, 이 역시 한 방에 해결할 수 있음이라.

30-30-30. 30년은 배웠고, 30년은 견뎌내면서 살았다. 이제 남은 30년은 즐기면서 살련다. 욕구나 욕망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련다. 술이든 담배든 커피든 가리지 않으련다. 믿는 구석이 있다. 삶과 죽음과 신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은 적어도 내 자신 문제로서는 끝을 봤다. 그리고 누군들 그렇지 않으리오만, 몸과 마음에는 ‘자동조절장치’가 있다. 아무리 욕망을 더없이 추구하고 싶어도 그 장치가 일정 수준에서 제어를 한다. 나는 내 몸과 마음의 자동조절장치를 신뢰한다. 그 장치의 성능은 지금껏 쌓아온 각 개인의 공력에 비례하리라.

철부지는 철을 모른다(不知). 씨를 부려야 할 때를 모르니 가을에 수확도 없다. 영면으로 가는 길에 빈손이리라. 철이 난다. 씨 뿌릴 때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는 것과 정말 씨를 부리는 것은 한참 거리가 멀다. 철이 들어야 비로소 실제 씨를 뿌린다. 수확의 많고 적음은 비와 바람과 해와 달에 달렸거늘, 무슨 상관이 있으랴.

새해부터는 철이 들려 한다.

※1)작자는 당대唐代의 유명한 재가불자인 방온거사龐蘊居士. 혹자는 방온거사가 아니라 무명씨無名氏의 작이라고 한다. 2)『논어』, 「위정편」.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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