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아베 신조 일본 총리, 그리고 삼성전자에는 공통점이 있다. 국민을, 대중을 ‘물’로 본다는 사실이다.
나 원내대표는 4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점차 근로기준법의 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다. 국가가 일방적으로 정해주는 ‘기준’의 시대에서 경제주체가 자율적으로 맺는 ‘계약’의 시대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국민들에게 마음껏 일할 자유를, 우리 산업에는 유연한 노동시장을 보장해야 한다”며 ‘일할 권리 보장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 등 노동관계법의 입법 취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주장이다. 헌법이 보장한 노동권을 침해하는 위헌적 발상이기도 하다. 노동관계법은 노동자가 사용자에 견줘 사회적 약자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헌법 32조는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노동자와 사용자가 ‘합의’했다 하더라도, 노동조건의 최저기준을 정한 ‘근로기준법’에 어긋나면 그 고용계약은 무효가 된다.
노동관계법은 산업혁명 이후 ‘계약 자유의 원칙’이란 명분으로 기업주들이 열악한 일자리를 양산해, 노동자의 생활조건이 바닥으로 치닫자 그에 대한 ‘반성’으로 만들어졌다.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장시간·저임금 노동에 시달리지 않도록 국가가 나서서 노동조건을 세세히 규정한 것이다. 아동 노동을 금지하고 하루 8시간 노동을 정착시킨 것도 이 때의 일이다.*
나 원내대표의 주장은 한마디로 노동문제에 대한 무지함과 노골적인 ‘반노동’ 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죽도록 일할 의무’와 ‘마음껏 해고할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발상이다. 100년 전에 이런 주장을 했다 하더라도 시대감각이 없는 무식한 발언이라고 지탄 받았을 것이다. 한데 2019년에, 제1야당의 원내대표가 이런 막된 주장을 하다니,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을, 대중을 ‘물’로 보지 않는다면, 이런 노동관계법의 근본을 부정하는 발언을, 그것도 국회에서 씨부렁거릴 수 있단 말인가!
아베 정부가 지난 4일부터 반도체·디스플레이의 핵심소재 3개 품목에 대해 한국에 수출통제에 들어갔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이다. 정치적 이유로 경제 보복을 가하는 것은 세계무역기구(WTO) 협정 위반이다. 아베는 북한의 안보 위협 등 여러 가지 핑계를 대지만, 설득력이 없다. <아사히신문>, <도쿄신문>, 심지어 보수 언론인 <요미우리신문>도 아베 정부의 조처를 비난했다.
아베의 목적은 분명하다. 이달 21일에 치러지는 참의원 선거에서 개헌 발의선인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보수층을 결집하려고 ‘한국 때리기’를 선택한 것이다. 전쟁을 포기하고 군대를 보유하지 않으며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 현행 ‘평화헌법’ 9조의 개정은 아베 총리의 오랜 꿈이다.
평화헌법 개정에 대한 일본 국민의 여론은 어떠할까? 헌법기념일(5월 3일)을 앞두고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반대 64% 대 찬성 28%(<아사히신문>), 반대 48% 대 찬성 31%(<마이니치신문>). 이에 반해 보수 언론인 <요미우리신문>의 조사에서만 반대 46% 대 찬성 50%이다.
왜 일본 국민들은 평화헌법 개정을 반대할까? 과거 침략전쟁으로 가장 고통 받은 사람들이 바로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정치가들의 야욕에 희생당한 사람들이 침략 당한 외국인만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막대한 고통을 안겼지만, 더 큰 희생은 자국민들이었음을 뒤늦었으나마 자각한 덕이다. 원자폭탄을 두 방이 얻어맞은 이들도 결국 애꿎은 일본의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개인적 야욕에 불타는 호전적인 아베가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헌법적 기초를 놓으려, 국민 여론을 조작하려 한다. 보수가 아니라 극우를 선동해 평화국가를 전쟁국가로 탈바꿈시키려 한다. 평화를 사랑함은 일본 국민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상징조작에 능한 정치가는 국민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곧, 아베가 평화헌법을 애호하는 자국민들을 ‘물’로 보지 않는 이상, 어찌 피차 소모적이고 위험천만한 ‘한국 때리기’를 감행할 수 있단 말인가!
프랑스 법원의 수사를 받고 있던 삼성전자가 결국 기소됐다. 프랑스 시민단체 셰르파(Sherpa)와 액션에이드 프랑스(ActionAid France)는 지난 3일 프랑스 파리 지방법원이 최근 삼성전자 프랑스 법인을 소비자법 위반(기만적 상업행위) 혐의로 예비기소했다고 밝혔다. 예비기소는 범죄 혐의를 사실이라고 볼 이유가 많지만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 하는 준기소 행위다.
삼성을 고발한 프랑스 시민단체 ‘셰르파’와 ‘액션에이드 프랑스’ 등은 <한겨레>가 최근 보도한 ‘글로벌 삼성, 지속 불가능 보고서’를 인용해 “삼성의 아시아 노동자들이 월급 26만 원 미만을 받으며 하루에 1600대의 휴대폰을 조립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프랑스 소비자들은 “노동자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한 삼성의 제품을 사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고 밝혔다.**
삼성전자가 프랑스 법원에 의해 예비기소되자 세계 주요 언론이 관련 소식을 전했다. “삼성이 반노동 혐의로 프랑스에서 기소됐다”(영국 <파이낸셜 타임스>), “삼성 윤리 서약이 프랑스 법원의 심판을 받게 됐다”(프랑스 통신사 <아에프페>(AFP)), “삼성의 열악한 노동 조건이 인간 존엄의 기본 조건을 충족하기 어려운 상황”(러시아 관영 <스푸트니크>). 그리고 <파이낸셜타임스>와 <아에프페> 등은 프랑스 법원의 판단에 삼성이 “현지 법과 노동권을 존중하고 있다”는 입장만 내고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하나의 가족, 삼성전자’? 고 황유미 이후에도 수십여 명이 삼성에서 일하다 죽어갔다. 삼성은 그들을 진정 가족으로 본 것인가? 소비자 기만행위가 ‘지속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대중을, 소비자를 ‘물’로 보지 않는 이상, 어떻게 ‘또 하나의 가족’이란 광고 카피를 스스럼없이 공중파를 타게 했겠는가!
어쩜 대중은 ‘물’인지도 모른다. 상징조작에 놀아나는 물신선, 물컹이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오는 21일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 당이 의석을 3분의 2 이상을 획득할지도 모른다. 갖은 수단으로-한국과는 달리 프랑스라서 거의 불가능하겠지만-파리 법원에서 ‘근거 없음’ 판단을 받고, ‘또 하나의 가족’으로서 삼성전자는 지속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년 4월, 총선에서 반역사적, 반노동적 행태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자한당이 제1야당을 넘어 제1당이 될지도 모른다.
저들이 우리를 ‘물’로 본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정녕 ‘물’이란 말인가?
*이지혜, 「전근대로 퇴행한 나경원의 노동관」, 『한겨레신문』, 2019년 7월 5일. **이재연/김완 옥기원 최성진, 「법 심판대 오른 ‘삼성의 반노동’」, 『한겨레신문』, 2019년 7월 4일. ***옥기원, 「‘반노동 경영’ 고수한 삼성, 국제 망신」, 『한겨레신문』, 2019년 7월 5일.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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