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이 여는 '詩의 아고라'③ 나비가 날개를 말리는 시간

손현숙 승인 2021.05.16 16:09 | 최종 수정 2021.05.18 15:20 의견 0

나비가 날개를 말리는 시간
                                 
손현숙

 

누가 꼭짓점을 향해 무릎걸음으로 온다 엄지와 검지를 나란히 눈썹 밑에 두고 나비 날개를 향해 몰입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날개를 말리는 시간 호흡을 정지한 채 꽃잎 한 장을 넘는다 햇살을 향해 정수리를 연다

그림자를 지우며 다가오는 죽음은 달콤할까, 침묵은 날개를 펼치기 직전의 빛나는 공포, 색색의 바람개비 속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리고 다음 날 택시에 가방을 두고 내렸다 치과에서 이빨 세 개를 뽑았고, 매일 노모의 약을 챙긴다

나이를 자꾸 묻는 엄마의 머릿속에 나는 누구로 사는 걸까, 눈썹 위에서 반짝이는 별의 이름은 이미 죽었던 나의 흔적이다 핸드폰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되찾은 가방은 속이 비었다 나는 양 날개를 염습하듯 포개고 사람의 얼굴에서 자꾸만 하늘을 본다

-시인동네. 2019. 2월호.

<시작메모>

나비가 날개를 말리는 시간은 죽기를 각오하고 다음을 모색하는 시간이다. 묵언 정진하듯 날개를 모은 채 젖은 날개를 말리는 일. 그것은 포식자에게 고스란히 자기를 노출 시키는 위험한 행위이다. 죽음 앞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자기를 고스란히 내려놓는 일. 결국 그 시간을 견딘 나비는 가벼워진 날개로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인데. 나도 그런 시간을 통과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위험은 사방에 도사리고. 오늘도 아슬하게 꽃잎 한 장을 넘는다.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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