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이 여는 '詩의 아고라'⑩ 고진하, 꽃뱀 - 불편당 일기
손현숙
승인
2021.07.03 10:37 | 최종 수정 2021.07.05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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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뱀
- 불편당 일기
여름날 아침
애호박이나 하나 따려고
뒤란으로 돌아갔는데
아이들 키만큼 자란
왕고들빼기
넓적넙적한 잎사귀 위에
꽃뱀 한 마리가
칭칭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을 치다가
다시 보니
꽃뱀은
왕고들빼기의
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둘이
하나로 된
환한 풍경 앞에
마음속 흉기마저 버렸습니다
뒤란이 더 환해졌습니다
▶고진하 시인의 시집을 읽고 :
‘불편당’은 고진하 시인의 집 당호이다. 그는 조금은 느리게, 가능하면 불편하게 살면서 청명한 마음을 지키고자 한다. 그것은 시인이 지키고 싶은 삶의 태도이자, 타자에게 건너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는 도무지 마음이 아닌 길 앞에서는 망설일 줄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넓은 의미에서 세상은 잔혹사. 먹고 먹히면서 재빠르게 살아남아야 하는 세상 속에서 거침없이 불편을 선택한 시인은 지금 행복할까. 시시포스의 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언덕을 내려오는 시인의 눈은 너와 나의 경계를 지운다. 타자의 이미지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나를 지워 당신이 되는 일. 꽃뱀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다가도 꽃뱀 속으로 느리게 흘러가서 왕고들빼기의 꽃을 피워내는 나라, 그것이 시인이 세운 ‘불편당’의 일상이다. 꽃그늘처럼 그의 곁을 지키는 아름다운 아내가 이야기한다. “예배드리러 갈까요?”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들판으로 나선다. 오늘은 아내 권포근의 생일, 시인은 저녁에 따뜻한 물로 아내의 발을 씻길 것이다.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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