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이 여는 '詩의 아고라'⑮ 역병이 지나가면 다녀가세요.

손현숙 승인 2021.08.06 16:27 | 최종 수정 2021.08.08 22:29 의견 0

역병이 지나가면 다녀가세요
                            손현숙

 

나는 머리 검은 곰족 여인이다 
동굴의 문을 등지고 앉아 
마늘과 쑥으로 몸을 채운다 
저 문은 내 등을 주시한다
잊을만하면 치받고 또 치받는 체증처럼
동굴의 문에서는 쇠종이 흔들린다 

나는 문을 열고 나갈 수도, 
주저앉을 수도 있다 
신단수 아래서 환웅이 등을 보일 때
남쪽에서 소식이 올라왔다
역병이 지나가면 다녀가세요 

역병에 방점이 찍혀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내 그림자에 몰입한다 
환하게 문을 통과한 
햇빛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동굴의 벽에 아른거리는 
그림자는 나인가, 나였던가, 내 속에 
동거하는 또 한 마리의 야수인가, 

곰의 몸에 갇혀 살던 여자는 
사람의 몸에 갇혀 사는 곰이 되리라, 
역병이 창궐해도 꽃들은 돌아왔다
풍경의 쇳소리는 귀신을 부르고
사람을 만질 수 없는 세상에서도 
등 뒤의 문은 여전히 열려있다

<시작메모>
지금은 역병이 창궐하는 시절. 문자 하나를 받았다. “역병이 지나가면 다녀가세요.” 나는 “역병” 보다는 “다녀가세요”에 더 골똘하다. 마늘과 쑥으로 백날을 견디던 여자는 등 뒤의 문을 주시한다. 여전히 오늘도 열려있는 문. 저 문을 박차고 나가면 죽음이 도래하는가. 아니다, 어쩌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릴지도 모르겠다. 자, 당신은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마늘과 쑥으로 백날을 견디어서 환웅의 아내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냥 그대로 저 문을 박차고 나가 야생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마당에는 채송화 고운 빛깔이 잔인하게 반짝인다.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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