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이 여는 '詩의 아고라'⑫ 나희덕, 예술의 주름들

손현숙 승인 2021.07.16 21:07 | 최종 수정 2021.07.19 23:04 의견 0

예술의 주름들
                  나희덕

 

이 해변에 이르러
그녀는 또 하나의 주름에 도착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그녀가 드디어 웃었다
죽은 남편을 잠시 잊은 채

이제 누구의 아내도 아닌
늙은 소녀

그녀의 주름 속에서 튀어오른 물고기들은 이내
익숙한 고통의 서식지로 돌아갔다

주름은 골짜기처럼 깊어
펼쳐들면 한 생애가 쏟아져나올 것 같았다

열렸다 닫힐 때마다
주름은 더 깊어지고 어두워지고
주름은 다른 주름을 따라 더 큰 주름을 만들고
밀려오는 파도 역시
바다의 무수한 주름일 것이니

기어이 끼어들 때마다
화음은 불폅화음에 가까워지고
그 비명을 끌어안으며 새로운 화음이 만들어졌다

파도소리처럼
오늘 그녀가 도착한 또 하나의 주름처럼

나희덕의 산문집 『예술의 주름들』을 읽었다 : 마음산책. 2021.

문화와 비평 수업을 하면서 시인이 읽은 예술에 관한 책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시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예술, 세상의 아름다움은 전문비평가의 그것과는 사믓 다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적어도 시인이 보고 듣고 감각 하는 것들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거나 자랑하고 싶은 것이 아닌, 오직 시인 자신이 느낀 그대로를 표현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것은 예술의 힘, 혹은 시쓰기는 쾌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불편함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라는 나의 오랜 믿음이 작용한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희덕의 『예술의 주름들』 속에서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그 숨겨진 시간과 고통과 상념과 사색들이 모두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녀가 밝힌 “아름다움이란 늘 바깥에 있는 어떤 것, 타인에게서 발견되는 어떤 것이다”처럼 그 많은 음악과 미술과 사진과 영화와 대중음악의 주름들은 부드럽게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예술가들이 마주했던 고통의 순간들이 언뜻, 내면 깊숙이 감춰진 언어로 아름답게 세워져서 다시 내 속으로 왔다.

나희덕 시인의 산문집 『예술의 주름들』을 손에 든 필자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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