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이 여는 '詩의 아고라'⑭ 홍해리, 마음이 지워지다
손현숙
승인
2021.07.31 10:37 | 최종 수정 2021.08.02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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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홍해리
이별은 연습을 해도 여전히 아프다
장애물 경주를 하듯 아내는 치매 계단을
껑충껑충 건너뛰었다
“네가 치매를 알아?”
“네 아내가, 네 남편이, 네 어머니가, 네 아버지가
너를 몰라본다면!”
의지가지없는 낙엽처럼
조붓한 방에 홀로 누워만 있는 아내
문을 박차고 막무가내 나가려들 때는
얼마나 막막했던가
울어서 될 일 하나 없는데
왜 날마다 속울음을 울어야 하나
연습을 하는 이별도 여전히 아프다.
홍해리의 시집 《마음이 지워지다》(놀북, 2021)를 읽었다 :
홍해리 시인은 우이동에서 오랫동안 묵묵하게 시를 살고 있다. 영문학을 전공해서 현대시의 사조에는 누구보다도 밝았지만, 시인은 고집스럽게 서정시를 쓴다. 그의 시에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사물, 꽃의 이미지는 상징을 넘어 극광처럼 여백의 미를 추구한다. 때로는 불꽃처럼, 때로는 음악처럼 사물들은 그의 시 속에서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한 십 년쯤 전이었을 거다, 문득 시인이 입을 열어 무엇인가를 이야기했다. 귀를 의심했었고, 아내가 치매에 들어 매화행을 시작했다는 말을 전했다. 아내의 치매를 꽃의 절정인 매화梅花에 들었다고 은유했다. 그 이후로 아내, 매화는 날로 심각해져서 향기마저도 모두 쇠하고, 사람들은 저마다 이제는 버리라고 시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러나 일 년, 또 이 년, 또 오 년, 시인은 아내를 지켰다. 그것을 사람들은 의리고 사랑이고 각별이고, 어쩌고 나름의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시인은 아내와의 마지막 이별조차도 상복 없이 담담했다. 꽃 지면 꽃 다시 온다는 시인의 일갈은 온몸으로 아내를 울고 있었다. 치매에 든 아내를 오래, 오래, 지키던 그의 몸과 마음이 까맣게 태워졌다, 이별이다.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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