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이 여는 '詩의 아고라'(20) 한영옥 - 사랑에 관한, 짧은
손현숙
승인
2021.09.10 11:30 | 최종 수정 2021.09.12 12:53
의견
0
이제야, 당신을
한영옥
이제야 당신 웃음이
이제야 당신 울음이
정겨운 꽃나무였음을
마른 흙만 푸석거리는
빈 화분 즐비한 베란다
당신 따라서 논매러 갈 걸
당신 따라서 밭매러 갈 걸
함께 저녁 차려 먹을 걸
마른 흙만 담긴 화분에
이제야 당신 심어 놓고
듬뿍 물을 뿌린다.
- 한영옥 시집 『사랑에 관한, 짧은』을 읽었다. ‘문예바다’. 2021 -
얼굴도 이름도 잊었지만, 기척으로 오는 사람이 있다. 속삭이며 다정하게 자꾸 뒤돌아다 보게 하는 무엇. 화자의 가슴에서 지워져서 다만 증상으로 남아있는 당신이 있다. 외면하며 모르는 척, 참 많은 시간이 흘렀겠다. 그리움은 그리움대로 잊히면 또 잊히는 대로 그렇게 시인의 사랑은 담담하다. 마음이 슬쩍 변한 당신을 보면서 미안하지만, 나도 슬쩍 편안함을 느끼는 우리들의 저녁. 열정도 친밀도 모두 훌훌 벗어버린 그 자리에 저녁 꽃처럼 “해가 떨어지고서도 꽃이 핀다는” 이 갑작스러운 기별 앞에서 화자는 “당신도 피어오르는 것을” 본다. “누가 뭐래나 꽃 피는데” 하면서 입술 꼭 다물기도 한다. 그러나 또 나비랑 꽃이랑 흔들리는 바람처럼 사소하게 고백도 한다. “당신 따라서 논매러 갈 걸” 아무렇지도 않게 지는 해 보면서 저녁꽃 보면서 “함께 저녁 차려 먹을 걸” 이제야 자신의 마음을 안다. 안심이 된다. 너무나 간절해서 오히려 담담한 한영옥 시인의 <사랑에 관한, 짧은>은 잊었지만, 도무지 잊을 수 없는, 소복소복 눈 내리는 겨울 삽화처럼 조용조용 당신을 소환한다.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