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이 여는 '詩의 아고라'(23) 오세영, 누란미녀

손현숙 승인 2021.10.02 10:35 | 최종 수정 2021.10.05 12:14 의견 0

누란미녀
- 우루무치 박물관에서 한 아름다운 여성의 미라를 보았다
                                          오세영

 

해 뜨고 해가 진다.
바람 불고 바람이 진다.
뜨거운 낮이 가고 차가운 밤이 온다.
모래는 항상 모래다.
해가 지고 또 해가 진다.
바람이 자고 또 바람이 분다.
차가운 밤이 가고 또 뜨거운 낮이 온다.
모래는 항상 모래다.
사막은 죽음을 용납지 않는 땅,
누가 이런 곳을 가려 육신을 묻었던가.
가지런한 흑발 ,석류石榴같이 하얀 치아,
복숭앗빛 고운 두 뺨,
나 오늘 누란의 모래밭에서 2000년 전의
오늘을 본다.
허무의 영원을 본다.

오세영 시인
오세영 시인

오세영 시집 《황금 모피를 찾아서》를 읽었다. ‘문학사상’. 2021.

사막을 꿈꾸던 소년이 드디어 사막을 경험한다. 시를 쓰고, 연구하는 일평생, 가슴 안 하늘에는 여전히 사막이 살아있다. 현실이 꿈으로 채색된 그 허공의 신기루. 잃어버린 정신의 영토를 찾아 시인은 실크로드를 꿈꾼다, 실천한다. 신라의 경주에서 동로마의 비잔티움까지 그 시대의 사람과 마음이 되어서 신체를 언어로 치환한다. 하루를 걸으면 하루를 쓰고, 열흘을 방황하면 열흘 치의 발자국을 언어로 옮겨 놓았다. 그렇게 오세영의 미학은 예술과 삶의 관계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태도를 취하게 한다. 문장에 마침표를 꼭꼭 찍듯, 몸으로 각인된 사막의 장면들은 모두 그대로의 색깔로 진실이 된다. 그러니까, 여기에 기록된 시들은 기억이 아니라, 스스로 보아서 알게 된 그의 진실이다.

어느 시콘서트 중. 오세영, 허영자, 필자, 문근영 시인(왼쪽부터)

오세영 시인은 단호하다. 이 시대의 누구나가 yes,라고 말할 때 그는 방향을 틀어 no,라고 분명하게 맞선다. 그런 시인의 성정이 실크로드 전 구간을 완주하게 했으리라. 그리고 마침내 한 여인을 만난다. 우루무치 박물관에 누워있는 청동기 시대의 생생한 여인. 아직도 손톱에는 봉숭아 물을 들이고 머리에는 사랑의 징표인 해오라기 깃털을 꽂고 있다. 그렇게 시인은 한 여인을 서슴없이 마음에 들인다. 그녀를 가슴에 묻고 하늘의 별을 따라 길을 나선다. 그러니, 시인이여! 사막처럼, 시의 길에서는 부디 무사하지 마시길.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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