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이 여는 '詩의 아고라'(30)박미라, 비긋는 저녁에 도착할 수 있을까?

손현숙 승인 2021.11.20 00:35 | 최종 수정 2021.11.26 18:44 의견 0

화양연화
            
     박미라


  -자꾸 꽃이라고 우기지 마라, 피었다 지는 것이다 다 꽃이
라면 열매는 무엇이라 부르겠느냐, 나비도 꽃도 그저 다녀가
는 것들이지, 허긴 올봄 목련꽃은 유난히 환하구나-

  비도 안오는데 멸치국수가 당기네,

  뜨건 국물에 엄지손가락 푹푹 담가가며 말아낸 국수 한 그
릇 간절하네

  그렇지만, 엄마,

  엄마는, 엄마는 죽었잖아요

  국수 한 그릇도 말아줄 수 없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오세요?

박미라 시집 《비긋는 저녁에 도착할 수 있을까?》을 읽었다. ‘현대시학’. 2021 

사전적 의미의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한 순간을 이야기한다. 시 속의 화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뒤섞이면서 지금, 이 순간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딸과 엄마의 대화인 것 같은데, 저들 간의 상호 소통은 저마다의 언어로 이루어진다. 유령 화자로 등장하는 엄마는 꽃이 피는 것과 지는 것의 등가를 이야기하면서 삶도 죽음도 모두 ‘환’이었음을 언사 한다.

박미라 시인
박미라 시인

살아있어서 간절한 것은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닌 그저 멸치국수 한 그릇 나눠먹으면 족하다는 이생의 화양연화. 그리고 이어지는 죽은 엄마를 그리다 못해 시도 때도 없이 망자를 불러내는 딸 화자의 고독. “국수 한 그릇도 말아줄 수 없잖아요/그런데 왜 자꾸 오세요?”의 발화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여한을 박미라 특유의 지독한 역설로 묘파 한다.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