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37) 여성 전용 남자 팔아요
손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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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4 21:48 | 최종 수정 2022.01.16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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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전용 남자 팔아요
손현숙
당신이 애인을 바꿀 때
나는 반짝반짝 굽 높은 구두를 산다
당신이 애인을 만질 때
나는 구두의 장식을 붙였다 뗐다 한다
그러다 살짝 흠집 파이면 매장으로 내달려
조금은 거만하게 그러나 재수 없게는 말고
맨발을 내보이며 나를 기억 하는지?
맨숭거리던 그 아이 내 발을 보자 놀랍게도
볼에 발간 피가 돌잖아
사방을 돌아봐도 여자점원 하나 없네
애인보다 선명하고 등빨이 단단한
한련화 입술처럼 나긋나긋한 꽃
맨 종아리 살살 쓸어주면서
상큼 발랄하게 ‘자기야’로 퉁치는 수작
너무 클래식하잖아 쫑알거리는 상술에
힘차게 카드를 긁네, 긁히네, 긁힌
고객님 앞에 중세의 기사처럼 무릎을 반으로 꺾고
발만 만지작, 만지작거리네
여기는 자본을 딛고 가는 구두, 꽃 파는 가게
당신은 실컷 애인을 바꾸시라 나는
꽃아, 오늘의 구두는 얼마?
- 2014. 애지. 가을호 특집 -
시작메모 :
세상은 지금 딱, 두 부류의 사람들만 존재하는 느낌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 그런데 또 묘한 것은 부자라고 모두 행복한 것만도, 가난하다고 또 불행한 것만도 아니다. 그저 다만 당신이 나보다 돈이 조금 많다거나 혹은 적다거나.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인가. 내가 돈이 조금 없다고 당신의 약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강자도 아니다. 각자 자기 팔과 다리를 흔들면서, 마음 안 하늘에서 위대한 개인이 되면 그뿐이다. 당신이 어찌어찌 돈이 왕창 생겨서 고급 세단으로 차를 바꿀 때, 나는 작고 반짝이는 큐빅이 다다닥 붙어있는 굽 높은 구두를 산다. 그러고 보니 여성구두 매장에는 창문이 없다. 살짝 밀폐된 공간에서 실핏줄도 여린 저 남자는 지금 나름 비싼 기호를 판매 중이다. 그렇다면 줄 듯 말 듯 쥐약도 안 먹는 나는 슬쩍, 카드나 굵어줄까. 어이. 너 말고 그 뒤, 꽃아, 싹 쓸어 한도는 넘지 말고.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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