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43) 부패의 힘, 나희덕

손현숙 승인 2022.03.05 11:12 | 최종 수정 2022.03.19 11:49 의견 0
나희덕 시인 [사진 = 김신용]

 

부패의 힘

                        나희덕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세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절대로 썩지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가장 안심이 안되는 나여

나희덕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를 읽었다. ‘문학동네_포에지’. 2022.

T.S 엘리엇의 ‘황무지’ 서문에 나오는 쿠메의 무녀 이야기는 충격이다. 제우스를 도와서 공을 세웠던 무녀. 그녀의 염원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녀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몰랐으리라. 그녀가 끝끝내 살아서 외쳤던 말은 “I want to die” 죽지 못하면, 끝을 부정하면, 세상의 모든 아침 또한 꿈도 꾸지 못할 일. 시인은 녹슬고 썩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것들에 대한 생성의 힘을 이야기한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은 방부 처리된 채, “자기 한계의 고백”이나 되돌아봄이 없는 것임을 역설의 시 한 편으로 증거 한다.

나희덕 시인 [사진 = 김신용]

동요 중에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라는 가사가 있다. 울면 산타클로스가 오지 않는다는 동요에 나는 “울어도 돼, 울어도 돼~ ♬”라고 개사를 해서 나의 아이에게 불러주곤 했다. 실컷 울어도 되고. 폭 망해도 된다. 이별도 괜찮고 조금 치욕스러워도 견딜 수 있다. 부력의 힘을 이겨야 바닥을 치고 물 위로 솟구칠 수 있듯이,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일 말고는 뭐든 끝까지 가봐도 괜찮다. 그러니, 우리 모두 넘어지지 않으려고, 잠시도 녹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기보다는 왕창, 아니면 조금 무너졌다가 툭, 털고 일어나도 괜찮지 않을까. 이제 곧 봄. 엘리엇의 시처럼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는” 우리 모두의 봄이 멀지 않다.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