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36) 먼지의 힘, 이서화
손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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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8 12:21 | 최종 수정 2022.01.09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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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의 힘
이서화
오래 걸려있던 액자 위로
손가락을 그어본다
숨어있던 사선이
손 끝에 먼지로 묻어난다
그 미세한 층의 먼지 속에는
참 여럿의 시간이 뒤섞여 있다
책상 모서리와 말라죽은 화분의 식물
방금 외출을 끝낸 외투의 귀가도 섞여 있다
먼지 속에는 시대와
종류를 가리지 않는 혼합성이 있다
한 가지로 된 먼지는 없다
섞임과 섞임을 거쳐서
내려앉은 한 겹의 먼지란
두루두루 친밀하다
종을 따지지도 않고
방향을 따지지 않는다
다만 부서지고 흩어지는 것들이라면
그 무엇도 먼지에 동참할 수 있다
한 줄기 빛 사이로
반짝이는 먼지의 숨
부유하는 것들의 층층에는
얇은 날개들이 숨어있다
옷을 탁탁 털면
내 몸이 내 몸을 급히 떠난다
이서화 시집 《날씨 하나를 샀다》를 읽었다. ‘시인수첩’. 2021
당신의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끝은 또 어디일까? 그런데 그런 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시인의 시는 질문을 넘어선 자리에서 발화한다. 시인은 발문에서 “새가 입을 열었다 닫는 사이에/ 놓친/ 이삭의 시를 줍겠다고 나섰다”로 어느 한 순간의 번짐을 염두에 둔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연민한다. 그래서 시는 낮고 작고 고통의 근원을 헤아리는 영혼들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먼지에게도 힘이 있는 것일까. 시인은 물론,이라는 말 대신에 먼지의 움직임에 조용히 마음을 기울인다. 온 우주의 첫, 은 먼지일 것이라는 생각은 “내 몸이 내 몸을 급히 떠난다”의 발화로 손 끝에 묻어나는 먼지 속에서 현재와 과거와 미래까지도 가늠한다. 그리하여 시인의 시선 속에서 “먼지의 숨”이라는 아름다운 언어도 가능했으리라.
이제 원주에는 ‘이서책방’이라는 문화공간이 생긴다. 혹시라도 당신이 원주에 닿으면 이서화 시인의 그곳에 들러 후리지아 향내와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어도 좋겠다.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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