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이 여는 '詩의 아고라'(31) 오정국, 재의 얼굴로 지나가다
손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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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6 18:44 | 최종 수정 2021.11.30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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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얼굴로 지나가다
오정국
섣불리 손댈 수 없는 얼굴
이마에 재를 바르고
이마에 재를 바른 손가락을 헤아려 본다
거기에 매달렸던 기도와 눈물을
나는 재의 얼굴로 거리를 지나간다
재의 얼굴은
사막 여행자 같다
양의 귀에 내 죄를 속삭이고
칼자루에 힘을 줬던
벌판, 수천 겹의 밤길을 헤쳐 온
낡고 거친 이마를 씻고 문지르지만
재의 얼굴은 무심하다
재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는다
나는 재의 얼굴로
나를 지나간다
눈구멍을 움막처럼 열어 둔 채
벙거지 하나 걸치고
매일매일 딴 세상으로 떨어지는 태양을 애도하면서
오정국 시집 《재의 얼굴로 지나가다》(민음사, 2021)를 읽었다
원죄를 이야기하는 성경 설화에서 가장 이해 불가는 카인을 대하는 야훼의 태도이다. 야훼는 동생을 살해한 카인의 이마에 표식을 남긴다. 누가 봐도 그것은 죄의 대명사. 그렇게 그는 아버지에게 부정당한 고독의 상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인은 또 야훼의 보호를 받는데. 누구라도 그를 해치면 가혹한 응징을 받게 된다. 이 풀리지 않는 질문과 질문을 나는 다시 오정국 시인의 시에서 만났다. 시인은 진정 고통을 자청하는 카인의 후예인가. 그는 이마에 재를 뒤집어쓰고 재의 얼굴로 저를 지나간다. 시인과 화자가 고스란히 중첩되는 이 고통의 서사는 “매일매일 딴 세상으로 떨어지는 태양을 애도하면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는 자기 징벌적인 이생의 삶을 그린다.
시집은 문자와 언어와 이야기와 괴담과 손글씨와 일기와 낙서와 낱말들로 시인의 서사를 꿴다. 마치 “무릎 꿇고 뉘우칠 통곡처럼 서있”는 해바라기처럼. 사족이지만, 오정국 시인은 자신의 속내는 오직 시 속에서만 허한다. 그러니 독자들이여, 그가 가볍게 농담으로 다가온다고 그가 왔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시인은 지금 농담이라는 페르소나 속에 자신을 밀어 넣은 채, 사막별로 걸음을 옮겨 적는 중이다. 이 시대의 고독한 가인, 오정국 시인의 ‘전봉건 문학상’을 축하한다.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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