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이 여는 '詩의 아고라'(29) 블랙커피
손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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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2 20:14 | 최종 수정 2021.11.14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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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커피
손현숙
올해도 과꽃은 그냥, 피었어요 나는 배고프면 먹고 아프면 아이처럼 울어요 말할 때 한 자락씩 깔지 마세요 글쎄, 혹은 봐서, 라는 말 지겨워요 당신은 몸에 걸치는 슬립처럼 가벼워야 해요
천둥과 번개의 길이 다르듯 짜장면과 짬뽕 사이에서 갈등하는 거 흙산에 들면 돌산이 그립고, 가슴의 A컵과 B컵은 천지차이죠 한 생에 딱 한목숨 몸뚱이 하나에 달랑 얼굴 하나, 해바라기는 장엄하기도 하죠
비 갠 뒤 하늘은 말짱해요 당신이 나를 빙빙 돌 듯 지구 옆에는 화성, 그 옆에는 목성, 또 그 옆에는 토성 톱니바퀴처럼 서로 물고 물리면서 우리는 태양의 주위를 단순하게 돌아요
당신, 돌겠어요?
시간을 내 앞으로 쭉쭉 잡아당기다 보면 올해도 과꽃은 담담하게 질 것이고, 때로는 햇빛도 뒤집히면서 깨지기도 하지요
- 리토피아, 2009년 봄호 -
<시작메모>
말을 빙빙 돌리는 사람이 싫다. 말의 어미를 흐리는 어투도 빤하다. 다음에 보자는 말도 믿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고맥락의 문화에 살면서도 그 애매한 비언어적 유희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시가 애매모호한 무엇이라고 말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상징과 비유로 여백과 여지를 남겨두는 것과, 속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상대를 훔치는 것과는 천지차이다. 직진본능, 그렇다, 나는 직진본능이 있다. 그 직진 속에는 ‘그냥’과 ‘무작정’, ‘담담’이라는 밑그림을 놓아두었다. 누가 내게 가을이 왜 좋은가,라고 묻는다. “사치스럽지 않은 뒷모습이 좋다”,라고 적고 “과꽃이 있어서”,라고 읽는다. 누구의 눈길도 강렬하게 잡아채지 못하지만, 담담하게 왔다가는 과꽃. 그냥 왔다 그냥 가는 과꽃의 조용한 강성이 좋다. 달콤함이 전혀 없는 블랙커피처럼.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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