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35) 이성희, 씨앗

손현숙 승인 2022.01.01 00:27 | 최종 수정 2022.01.02 23:25 의견 0

씨앗
                       이성희

 

나는 모른다
왜 그렇게 많은 다른 시간과 다른 일생들이
이 순간 서로를 스치며 지나가는지
나는 모른다
어떻게 홀로 뻗은 봄날 여린 나무 가지 하나가
평면 공간을 입체로 만드는지
왜 꽃이 벼랑에 피는지
칠이 벗겨진 벽에 왜 이끼가 끼는지 나는
모른다
비탈길 가득 은행잎들이 떨어져 내릴 때
뿌리에 밀려와 있는 바다는 왜 침묵하는지
허공에 손을 내밀면 녹아 버리는
무슨 내밀한 신호 같은 눈들이 가득 날리는 겨울날
왜 씨앗은 그토록 작고 어두운 곳에서 꿈꾸는지
왜 내가 시를 쓰는지

 

이성희의 테마로 읽는 경이로운 미술 이야기 《거울, 그림자, 꿈》을 읽었다. ‘인타임’. 2021.

윌리엄 홀먼 헌트 - 샬롯의 아가씨

새해 첫날 첫 시로 이성희 시인의 ‘씨앗’을 읽는다. 시의 마지막 행과 첫 행을 무작위로 이어 붙여도 시말은 오롯하다. “왜 내가 시를 쓰는지”, “나는 모른다”고 말하는 시인의 속내는 결국 거울 속의 꿈과 그림자의 침묵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일이다. 해석이 조금 어려우신지?

심사정 - 월매

그렇다면 이성희 시인의 ‘테마로 읽는 경이로운 미술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도 좋겠다. 매일매일 “거울아 거울아, 누가 이 세상에서 제일 이쁘”냐고 의심하는 백설공주의 계모는 왜 “자신의 눈보다 거울의 눈을 더 신뢰”했는지. “르네상스는 왜 그림자를 새로 발명해야 했는지.” 그리고 또 누가 최초로 그림 속에 그림자를 그려 넣었는지. 그림자가 어떻게 그림자를 갖고 있는 실재, 즉 환영幻影을 창조했는지. 내가 여기라 믿고 있는 지금이 혹시 기억의 오류는 아닌지. 시를 꿈꾸며 오늘도 열렬한 당신은 어쩌면 꿈속에서 흩어졌던 바람은 아닐는지. 새해 첫날 아침, 만약 내 것인데 내 것이 아닌 당신이 궁금하다면 이성희 시인의 거울, 그림자, 꿈을 서성여도 좋겠다.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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