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33) 용목이라는 말, 아세요?
손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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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7 21:37 | 최종 수정 2021.12.19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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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목이라는 말, 아세요?
손현숙
좋은 목재는
비 맞고, 벌레 먹고, 벼락 맞고
천둥소리에 뿌리째 흔들리면서
속이 문드러진 나무래요
벌레들이 제 집을 드나들 듯
속을 실컷 파먹어서
도무지 알 수 없는 길이 생기면
문득, 하늘 문이 열리고
목수는 다만 그 길을 따라
칼집을 내면서 살을 벌리면서
나무의 결을 가만히 떠내는 거래요
태초의 생명을 손수 받듯
공간 속에 촘촘하게 박힌
하늘 무늬를 받들어서 지문이 닳도록
깎고 문지르면서 달래는 거래요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나무에
숨을 풀어 생기를 불어넣어,
용의 미늘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목수는 맨발의 신을 공손히 받든대요
받들어서 가만히 벼리는 거래요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아름다운 무늬, 용목
- 2017. 문파. 가을호 -
<시작메모>
나무를 만지는 사람의 손이 좋다. 하나님은 목수의 얼굴을 닮았을 것이라 믿고 살았다. 나무의 결을 거스르지 않듯, 사람의 결을 만져주는 사람을 기다린다. 오래 흔들리면서 오래 아팠던 사람. 천둥과 번개와 벌레와 치욕이 몸을 들락거리면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아름다운 무늬를 몸에 담고 사는 사람, 용목. 그 찬란한 고통의 극광을 공손히 받들어서 조용히 벼리는 시간. 그러니 우리는 모두 괜찮다. 아픔이, 슬픔이, 고독이, 가난이, 우리를 무너뜨려도 지금은 다만 무늬를 만드는 때, 조용히 버티면서 견디면서 맨발의 신을 기다려도 좋겠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성탄일이다. 캄캄한 당신도 행복했으면, 크리스마스니까.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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