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이 여는 '詩의 아고라'(26) 팬티와 빤쓰

손현숙 승인 2021.10.23 10:58 | 최종 수정 2021.10.26 21:35 의견 0

팬티와 빤쓰  
                           손현숙

 

 

외출을 할 때는 뱀이 허물을 벗듯
우선 빤쓰부터 벗어야 한다
고무줄이 약간 늘어나 불편하지만, 편안하지만
그래서 빤쓰지만, 땡땡이 물무늬 빤쓰

집구석용 푸르댕댕 빤쓰는 벗어버리고
레이스 팬티로 갈아입어야 한다
앙증맞고 맛있는 꽃무늬 팬티 두 다리에 살살 끼우면
약간 마음이 간지럽고 샅이 나풀댄다
나는 다시 우아하고 예쁜 레이스 공주

밖에서 느닷없이 교통사고라도 당한다면
세상에, 땡땡이 빤쓰인 채로 공개되면 어쩌나
비싼 쎄콤 장치로 만약의 위험에 대비하듯
유명 라펠라 팬티로 무장한다

오늘 바람이라도 살랑, 불라치면
혹시라도 치마가 팔랑, 뒤집힌다면
나, 죽어도 꽃무늬 레이스로 들키고 싶다

- 문학사상. 2004. 4월호

[송영훈의 에트랑제 - Lady in Red / https://www.youtube.com/watch?v=BKFrywvDhwQ]출처 : 인저리타임(http://www.injurytime.kr)
[송영훈의 에트랑제 - Lady in Red / https://www.youtube.com/watch?v=BKFrywvDhwQ]

<시작메모>

아주, 아주 오래전에 발표했던 시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보이는 부분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 관심이 가는 거. 자기 전에 머리 빗기. 현관의 신발 정리하기. 글쓰기 전에 연필 깎기. 따뜻한 차 마시기. 외출할 때 속옷부터 갈아입기. 그러니까, 있음과 없음을 무관하게 보지 못하는 것은 내 삶의 태도다. 누가 뭐라나, 내가 나를 단속하거나 말거나. 이건 강박이 아니라, 삶이자 내 마음에 대한 예의다. “하쿠나 마티타 폴레 폴레~”  괜찮아, 천천히 천천히…, ‘라이온 킹’에서 외웠던 주문을 이 가을, 혀끝에 올려본다. 어라, 아직도 기억하네. 만화 같은 세상에서 만화영화의 한 장면을…. 여러분의 하루도 무탈하시길.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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