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이 여는 '詩의 아고라'(25) 이동훈, 몽실탁구장

손현숙 승인 2021.10.16 10:28 | 최종 수정 2021.10.17 12:26 의견 0

동피랑에 오면
                      
이동훈

 

동피랑에 오면 통영이 보인다

강구 안을 내려다볼 것 같으면
서귀포 앞바다와 남덕이 그리운
이중섭의 봉두난발이 보이고.

항구에 철선이 닿을 때면
오르내리는 손님과 화물을 좇는
김춘수의 반짝이는 눈빛이 보이고.

서문고개와 세병관 사이
아버지 집을 멀찍이 돌아서 지나는
박경리의 가여운 자존심이 보이고.

길 건너 이층집을 보며
중앙우체국에 편지 부치러 가는
유치환의 은은한 연애가 보이고.

명정동의 난이를 잊지 못해
술에 취해 시장 거리를 헤매는
백석의 닿을 데 없는 유랑이 보이고.

통영에 오지 못하고
통영의 멸치와 흙 한 줌에 울었다는
윤이상의 서러움이 보이고.

벽마다 꽃피는 동피랑에 오면
중섭과 중섭의 사랑이
통영과 통영의 사랑이
무채색 파노라마로 보인다.

이동훈 시집 《몽실탁구장》을 읽었다. ‘학이사’. 2021

중원에는 협객이 많다. 이동훈 시인의 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그에게 문학의 이름으로 줄을 세우는 일류, 이류는 의미가 없다. 기호를 소비하는 시대의 흐름이고 뭐고, 그는 그저 묵묵하게 길을 간다. 계절이 계절의 부름을 받듯, 좋아하는 곳을 향해 느긋하고 편안하게 자세를 잡는다. 그래서 그는 지치지 않고 글을 쓴다. 막말로 자기 쪼대로 산다. 그렇게 시인은 대구에서 국어교사로 살면서 시를 쓰고 평론을 하면서 문학을 유랑하는 협객이다. 몸이 세상을 느끼면 쓰고, 아니면 막바로 치운다. 백지 앞에서의 공포를 유희로 치환한다. 아무리 구석진 곳에라도 반응이 오면 기차 타고 버스 타고 또 지하철 타고 마을버스 타고 먼먼 애인을 찾아가듯 간다, 본다, 느낀다, 한 예술한다.

이동훈 시인 초상

그가 시집을 출간했다. 제목도 뭉툭하다. 이동훈 시인의 시집 《몽실탁구장》 속에는 탁구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이 세상 구석구석을 살피면서 쓴다. 어느 날은 우리시의 시수헌에서, 어느 날은 대구 서문 시장에서 또 어느 날은 통영 동피랑에서 화가와 시인과 소설가와 그리고 음악가 윤이상을 소환한다. 시인은 시집의 통념인 해설 없이 자신의 산문으로 시집을 마무리하는데, 거기 이육사 시인의 말을 빌려 “여행에 이유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고 사무인 까닭”이라고 일갈을 한다.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은 “한 번 척 느꼈을 때 출발하는 것이 좋다.” 고 하는 그의 생각에 나도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처럼 오소리 신세가 되어 어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나랑 함께 여기 모여 몽실탁구장을 구경하면 된다. 간접체험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나도 가끔은 몽실탁구장 속의 시인들처럼 기꺼이 몰락하는 사소한 협객을 꿈꾸니까.

전선용 시인의 문인화 전시회에서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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