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이 여는 '詩의 아고라'(22) 정진규, 서서 자는 말

손현숙 승인 2021.09.25 11:25 | 최종 수정 2021.10.09 11:54 의견 0

서서 자는 말
                      정진규


내 아들은 유도를 배우고 있다.
이태 동안 넘어지는 것만 배웠다고 했다.
낙법만 배웠다고 했다.
넘어지는 것을 배우다니!
네가 넘어지는 것을 배우는 동안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살았다.
한번 넘어지면 그뿐
일어설 수 없다고 
세상이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잠들어도 눕지 못했다.
나는 서서 자는 말
아들아 아들아 부끄럽다
흐르는 물은 
벼랑에서도 뛰어내린다. 
밤마다 꿈을 꾸지만
애비는 서서 자는 말

정진규 시인, 정진규 시인의 작품 세계를 종합적으로 다른 책 『本色』, 시굿을 벌이는 정진규 시인(왼쪽부터)

<정진규 시인 4주기에 부쳐>

정진규 선생님 돌아가신 지 벌써 4년이다. 그동안 세상은 참 많이도 변했지만, 선생은 저기 저곳에서 여전하시다. 서둘러 떠나가신 그곳의 하늘도 여기 하늘만큼이나 높고 맑은지, 더러는 여쭙고도 싶다. 내가 문단에 등단했을 때, 5년을 살아남고 10년을 살아남고 15년을 살아남고 그리고 혹시 기적이 일어나서 20년을 살아남으면 그때가 등단이다,라고 하셨던 두렵고도 잔인했던 말씀. 나는 그 비장한 전언을 마음속 깊이 독약처럼 품고 산다.

정진규 시인을 인터뷰 하는 필자

등단하고 20년은 지나야 그때부터 글다운 글을 쓸 수 있다는 이 무서운 일갈. 그리고 죽음. 다리가 썩어들어가면서도 마지막 시집의 원고를 손보고 완성한 후에야 병원으로 들어가셨던 시인의 뒷모습. 주검 앞에서는 공도 과도 모두 허망하다. 매년 9월이 되면 찾아오는 이상한 허기, 선생의 4주기가 내일모레다. 아직도 ‘현대시학’을 사랑하고 계신지, 아직도 매일매일 시를 쓰고 계신지. 시 잘 쓰는 시인을 여전히 질투하시는지. 여전히 예술의 해방과 미학에 골똘하신지. 그곳에서는 부디 시에 끄달리지 마시고 백수건달로 편안하셨으면 좋겠다. 그립습니다. 선생님.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