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이 여는 '詩의 아고라'(16) 윤의섭, 내가 다가가도 너는 켜지지 않았다
손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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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3 16:45 | 최종 수정 2021.08.19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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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윤의섭
오늘까지는 꿈이었어요
이렇게 말하는 유골단지
지난 번 갖다 놓은 꽃에 생기가 돋아나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건 같이 기억할 수 있다는 가능성
너라는 꿈을 꾼 것이다
운중로라고 쓰인 길에 들어서면서
한 번은 다시 오게 될 줄 어떻게 알았을까
주인이 바뀌었지만 식당에선 익숙한 저녁밥 냄새가 나고
천년 궤적을 따라 줄지어 날아가는 새들
눈을 감으면 세상의 모든 태양이 차례로 지고
구름 속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모두 구름 속으로 착륙하는 동시의 기억
오늘부터는 처음 부는 바람과 처음 생긴 빗방울 사이
뒤를 돌아보니 거대한 유골단지가 잠들어 있다
누구였을까 꿈이 다 지워진 것만 생생하다
윤의섭 시집 《내가 다가가도 너는 켜지지 않았다》를 읽었다. ‘현대시학’. 2021.
윤의섭 시인의 목소리는 가만하다. 작은 것도 아니고 속삭이는 것도 아닌, 그저 가만한 소리로 담담하다. 시인과 함께 길을 나설 때도 그는 조용히 사람의 곁을 지킨다. 나비나 꽃이 고요하게 허공 중을 말아 쥐듯, 몰입. 그는 하루를 영원처럼 오늘의 시간에 오늘을 집중한다. 꽃이 혹은 그가 아름다운 이유이기도 하다.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내가 다가가도 너는 켜지지 않았다》에서는 사랑의 이야기를 꿈의 사건으로 보여준다. 주술사의 주문처럼. 그러나 시인의 꿈 이야기는 몸과 시간을 받기 전 세상의 모습이고, 또한 죽음 건너의 풍경이기도 하다. 안다는 것을 공유하는 기억의 세상에서 저편으로의 전환은 이상하고 아름다운 ‘이후’의 실감이다. 시인은 가까이 다가서면 더 멀리 달아나는 불가능의 세상을 언어의 극단을 사용하여 시간을 극복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생에서 우리는 모두 시간의 여행자들이니까. 그렇게 화자는 영혼이 몸을 저버린 사랑 ‘이후’를 돌아다 본다. “오늘까지는 꿈이었어요”라면서 몸이 없는 또 다른 세상을 살아보기로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그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오늘부터는 처음 부는 바람과 처음 생긴 빗방울 사이” 그리하여 “너라는 꿈을 꾼 것이다”라고 사랑을 시간의 서사 속에서 아름답게 감각한다.
◇손현숙 시인 :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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