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47) 근본 없다는 말, 김명기

손현숙 승인 2022.04.02 12:16 | 최종 수정 2022.04.06 10:29 의견 0
김명기 시인

근본 없다는 말
                               김명기


 

 

마당가 배롱나무 두 그루에 꽃이 한창이다
한 그루는 장날 뿌리째 사다 심었고
한 뼘쯤 더 자란 나무는 가지를 베어 꺾꽂이했다
뿌리째 심은 나무는 사방 고르게 가지를 뻗어 꽃 피우고
베어 심은 것은 뿌리내리며 가지를 뻗느라 멋대로 웃자랐다
그중 제일 먼저 뻗은 가지는 땅을 향해 자란다
죽을 수도 있었는데 죽을힘 다해 살았겠지
기댈 데가 없다는 건 외롭고 위태롭다
죽을 수가 없어 죽을힘 다하는 생
뿌리가 얼마나 궁금했으면 아직도 땅을 향해 자라날까
무심코 내뱉는 근본 없다는 말에는 있는 힘 다해 뿌리내리며
허공을 밀어 올리는 수없는 꺾꽂이 같은 삶이 깊숙이 배어 있다

김명기 /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2005년 계간 《시평》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북평장날 만난 체 게바라』와 『종점식당』, 맛 칼럼집 『울진의 맛 세상과 만나다』를 냈으며, 제2회 작가정신 문학상을 수상했다.

김명기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을 읽었다. ‘걷는 사람’. 2022.

김명기 시인의 시집을 읽는 내내 아팠다. 세상과 맞서는 시인의 용기 앞에 무릎이 꺾였다. 동시대에 함께 시를 쓰면서, 나는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을 그는 묵묵하게 몸으로 실천한다. 시집 속에는 버려진 존재의 울음들로 자욱하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슬픔은 시인의 품 안에 들어와서 언어로 부려지는 순간, 더 이상 슬픔이 아닌 위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시인은 어리고 여리고 상처받은 존재들에게 온몸으로 몸 갚으면서 산다. 바라는 것 없이 그냥 그렇게 그날을 저들과 함께 지낸다. 가난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노동의 품격과 사랑과 이별이 매일 새로운 오늘처럼 당당하다. 그 당당을 담담하게 입고 사는 품이 커서 나는 자꾸 아프다.

위의 시처럼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근본 없다”는 말을 던지거나 받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 말속에는 지독한 독이 묻어 사람을 해쳤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분명하게 배웠다. 무심코 던진 말이 어떻게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지를. “죽을 수도 있었는데 죽을힘을 다해 살”아내야 하는 고통이 나의 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당신은 이 참담한 시절의 절망을 어떻게 견뎌내고 계시는지. 시인은 이 봄, 꽃 한 송이 피워내기란, 자기의 전부를 건 사건이라면서 저 혼자 저만치서 사무친다.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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